“어려운 조국 돕는건 지식인 의무”

8년만에 집으로 돌아온 로버트 김

미 해군정보국에서 일하며 한국측에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8년간 복역했던 로버트 김(64·한국명 김채곤)씨는 2일(현지시간) 문화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조국을 지식인이 돕는 것은 기본적 의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조국을 향한 사랑 때문에 중년의 나이에 직장과 재산, 사회적 명예 등 모든 것을 잃은 채 수인생활을 해야 했던 김씨는 1일 워싱턴시내에서 40마일가량 떨어진 버지니아주 애시번 자택으로 돌아와 첫밤을 보냈다. 낯선 공간에서 이방인들과 고단한 세월을 보냈던 김씨는 “모든 것이 익숙한 집에서 자유롭게 잠을 자고 일어나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일상의 삶으로 돌아온 게 꿈만 같다”고 말했다. 부드러운 그의 표정에는 8년간의 풍상이 남긴 흔적이 없지만, 원두커피를 내리는 일이나 휴대전화로 전화 거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그의 몸짓에서 오랜 감옥생활의 무게가 느껴졌다.

2일 오전 자택에서 만난 그는 “윈체스터 감옥에서 나온 뒤 가족과 지인들의 전화를 받느라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면서 “이제 집에서 첫 아침을 맞으니 자유인이 됐다는 것이 실감난다”고 말했다. 김씨는 “96년 북한잠수함침투사건때 한국정부가 필요한 정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한반도해상의 시간대별 정보를 백동일 당시 주미대사관 해군대령에게 넘겨줬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한국정부가 그의 석방문제와 관련해 실질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지적과 관련, “나는 내 조국을 위해 일을 했을 뿐 한국정부에 대해 섭섭해하지 않으며 탓할 생각도 없다”면서도 “주권국가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백 대령을 한직으로 보내고 예편시킨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면서 강한 불만을 피력했다. 김씨는 “내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며 앞으로 남은 생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겠다”고 강조했다.

김씨의 자택은 조그만 타운하우스다. 집에 들어서니 1층에는 트레이드밀 등 실내운동시설이 놓여있고, 2층에 로버트 김 부부와 자녀, 손녀들의 사진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화장실과 거실에는 한국에서 발간된 각종 잡지등이 빼곡히 비치되어 있어 한국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초코케이크와 바나나케이크 등을 사갔더니 김씨는 “단 케이크를을 정말 좋아했는데 감옥에서 나온 후 처음 먹어본다”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원두커피를 끓이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며 소감을 얘기하는 그의 몸놀림을 보며 ‘육신의 자유가 영혼을 저토록 자유롭게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의 지인들로부터 수없이 전화가 왔다. 대부분 한국에서 온 전화인 듯한데 김씨부부는 연방 “고맙다”는 말을 했다.

김씨는 오는 7월27일 공식 가석방이 되는 날까지 집앞 잔디밭은 물론 베란다에도 나갈 수 없는 가내영어(家內囹圄)의 몸이지만 그래도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기 때문에 매주 일요일마다 예배를 보기 위해 교회에는 갈수 있다고 한다.

―8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 이제 제한적이나마 자유인이 됐는데, 집에서 첫 하루를 맞는 느낌이 어떤가.

“일상의 모든 일이 낯설고 서툴기만 하다. 휴대전화 걸기도 어렵고 인터넷도 쉽지 않다. 지난 8년간 세상이 많이 변했기 때문에 그것을 익히고 변화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감옥에서의 8년생활은 어땠는가.

“미국의 감옥은 조금 희화적으로 말하자면, 엄격한 기숙사와 같은 곳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정해진 일터로 나가 일을 하고 저녁때 들어와 잠을 잔다. 별다른 강제는 없다. 집없고 가족없는 이민자들은 오히려 재워주고 밥을 주고 직장도 주는 감옥이 편하다는 말도 우스개처럼 한다.”

―그래도 지식인으로서 감옥생활을 견뎌내기가 힘들었을 것 같은데, 감옥의 일상을 소개한다면.

“모든 수인은 시간당 16센트에서 49센트까지 임금을 받고 일을 하는데 내 경우 직업이 해군정보국 컴퓨터 전문가였기 때문에 교도소측에서는 컴퓨터 관련업무는 금지시켰다. 처음에는 치과의사 보조공을 하다가 법률도서관 사서, 블루칼라 일을 거쳐 최종적으로 비영어권 수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생활을 했다. 육체노동은 시간당 노임이 가장 높아 가족의 생계비를 조금이나마 돕고 싶어 택했던 것이다. ”

―한국에서는 김 선생을 ‘조국이 버린 애국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일찍이 미국에 이민 온 뒤 주류사회진입에 성공한 50대중반의 가장에게 과연 ‘애국’이나 ‘조국’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가.

“한국에서처럼 우리끼리 모여 살면, 굳이 애국심이니 조국애니 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처럼 다민족 사회에 와서 살다보면 일본인은 일본인으로서, 멕시코인은 멕시코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느끼게 된다. 지식인이 자기 조국을 돕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의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자기가 태어난 조국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는 조국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게 현실인데.

“우리 집안은 돈버는 비즈니스보다는 국가의 녹을 받으며 살아왔다. 국가에 대한 봉사, 애국심은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1996년 당시 북한의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때 해군정보를 주미한국대사관의 백동일 해군대령에게 넘겨준 것도 그같은 소신에 바탕한 것이었나.

“그렇다.”

―1996년 당시 사건의 상황을 소개한다면 .

“백 대령이 속초 앞바다에 북한 잠수함사고가 났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알수 없다고 하기에 해군정보국에 입수되는 한반도주변 시간별 데이터를 분석해서 줬다. 당시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은 2기였는데 좌표상으로는 1기만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나 사고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북한잠수함 사건이 결국 운명을 바꿔놓은 셈인데, 후회나 회한은 없는가.

“후회하지 않는다. 한국에 대해서도 섭섭한 것이 없다. 내 조국을 위해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다만 조국을 위해 일을 한 백 대령이 귀국 후 한직으로 밀려나고 결국 예편한 것에 대해서는 아쉽게 생각한다. 주권이 있는 나라가 미국이 요구한다고 해서 나라 위해 일한 사람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수감된 후 한국정부가 보인 ‘냉담함’에 대해서는 “한국정부를 탓하지 않는다”며 애써 평정을 유지했지만, 백 대령이 인사상 불이익조치를 당한 것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나라 위해 일한 일꾼을 그렇게 대우하면 안된다”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김씨는 1일 석방소식을 알고 전화를 한 백 대령과 ‘유선’ 조우했지만 중년의 두 사람은 복받치는 설움 때문에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눈물 때문에 제대로 얘기도 나누지 못했다는 게 부인 장씨의 귀띔이다.

―한국의 반미감정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무조건적 반미는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은 경제력으로나 무력으로나 세계최강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시하고 살 수 없는 나라다. 반미를 하기에 앞서 미국을 제대로 보고 미국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지난 8년간 한국이 많이 변화했는데, 한국에 대해 조언을 한다면.

“컴퓨터 전문가적 관점에서 얘기한다면 한국은 그간 기술투자보다는 단기적 이익에 집중해 외국에 많은 로열티를 지불하며 물건을 만들어왔다. 한국은 늘 돈을 빨리 버는데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더 중요한 것은 고부가가치 제품을 위한 장기적 투자라고 본다.”

한국의 변화에 대한 질문은 과학기술이나 연구개발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북한잠수함사건 이후 남북관계나 한미관계 등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는 “괜한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미묘한 문제는 나중에 답하겠다”며 말머리를 돌렸다. 지난 8년간의 기록을 어떤 형식으로든 정리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도 “3년간의 보호관찰기간이 끝나면 생각해볼까…”라며 말꼬리를 흐렸다.1973년 미국시민권을 받아 그 스스로의 표현대로 ‘미국에 자원 입양된 한국인’ 김채곤씨는 ‘태어난 조국’을 위해 일하다 ‘입양된 제2의 조국’으로부터 벌을 받았다. 백발이 된 60대 중반의 김씨는 “이제부터 제2의 삶을 살겠다”고 했다. 또 먼 후일 한국에 가게 된다면, 수감중 세상을 떠난 선친(김상영)의 묘와 함께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강릉의 북한잠수함 전시장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동포들에게 직접 전하는 서신메시지를 권했더니 “동포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는 인생을 살겠다”고 썼다가 “항상 조국을 잊지 않겠다”는 말로 바꿨다. 아직은 문밖에도 나갈 수 없는 ‘반쪽 자유인’이지만 힘을 주어 또박또박 글을 쓰는 그의 손매엔 조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남은 여생을 살겠다는 강한 의지가 배어 있었다.

(문화일보 200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