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 美 위협할 정도로 키울 것"

로버트 러플린 KAIST 신임 총장 본보 단독 이메일 인터뷰

“KAIST(한국과학기술원)가 세계적인 대학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 “한국과학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미국을 협박할 정도로 키워보고 싶다.”

국내 최고의 과학기술전문대학 총장에 선임된 미국 스탠포드대학 로버트 러플린(54ㆍ사진) 교수는 1일 한국일보와 가진 이메일 인터뷰에서 총장으로서의 청사진을 밝혔다.

199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그는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에 대해 높게 평가하면서 미국,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중국과의 경쟁에서 계속 앞서 가느냐, 뒤쳐지느냐의 기로에 있다고 조언 겸 경고도 아끼지 않았다.

KAIST 총장에 지원한 이유에 대해 그는 “한국의 친구들과 과학기술부 고위 관료로부터 강력한 권유를 받았다”고 밝혀 그의 총장 선임 배경에 정부의 의지가 있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한국의 ‘이공계 위기’에 대해 경제 논리로 풀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돈이 있는 곳에 왜 사람들이 가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다음은 일문 일답.

-KAIST 총장에 선임된 소감은.

“한국에서도 전례없는 일이고 나도 대학 운영은 처음이어서 다소 어리둥절하다. 그러나 걱정하지는 않는다.

KAIST는 이미 세계적인 대학이고 그런 대학들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KAIST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가.

“KAIST는 미국의 메사추세츠공대(MIT)나 스위스 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ETH)과 비슷한 특성화대학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투자한 것에 비해 국제적인 지명도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KAIST을 세계적인 과학기술대학을 발전시킬 복안은.

“세부적인 계획은 아직 없다. 학교에 가면 먼저 교수들과 일련의 미팅을 진행하고 학생들의 캠퍼스 생활도 관찰하며 업무를 파악하겠다. 작지만 견고한 시스템을 만들고, 문제들을 맞닥뜨리고 정복해가겠다.”

-연구만 해온 과학자로서 대학경영을 잘 할 수 있을지, 우려의 목소리도 있는데.

“그런 우려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잘 안다. 그러나 대학의 경영 또한 작업을 위해 필요한 공구를 골라 사용하는 기술적인 분야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인력과 재정도 갖춰진 것으로 안다. 경험과 훈련이 능력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유연성과 사고력이 중요하다. 후기 산업시대에 우리의 일은 사람을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고력과 자율성을 키워주는 것이다.”

-한편으로 ‘과학분야의 히딩크’로 기대하는 한국 국민도 많은데.

“과학기술정책은 하루 밤사이에 바뀔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마법의 힘을 가진 듯이 쳐다보지만 그렇지 않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보듯 마법의 힘은 아이들이 가진 것이다. 부모는 자녀들이 그들의 힘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떼도록 해주는 것이다.”

-한국의 과학기술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미국과 일본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중국과의 경쟁에서 계속 앞서가느냐 뒤쳐지느냐의 경주가 될 것이다.”

-과학의 대중화가 가능하다고 보는가.

“과학의 인기를 높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과학을 후기 산업사회에 맞도록 재창조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 과제이다.”

-한국 학생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학기술의 경제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돈이 있으면 학생들은 온다. 다른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공계가 가면 돈을 벌기가 어려운 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대학의 서열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학을 서열화해서는 안된다. 대학은 졸업생이 이뤄낸 성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앞으로의 일정은?

“재직 중인 스탠퍼드대학과의 각종 문제가 남아 있고 과학기술부와의 계약조건 협상도 진행 중이다. 일단 국제 물리올림피아드가 열리는 7월께 한국에 갈 예정이다. 공식적인 업무 시작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한국말을 못하는데.

“한국말을 못하는 것이 그리 큰 문제는 안될 것이다. 휼륭한 통역을 쓸 것이다.”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한국은 빠른 기간에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고 변화에 민감한 모습을 보여왔다. 미국과 중국은 너무 커서 쉽게 변화하기 힘든 구조이다. 한국의 발전과정을 모델로 삼아 이공계 리더들을 양성하고 싶다. 나의 최종 목표는 과학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미국을 협박할 정도로 한국을 키워보는 것이다.”

-당신에 대해 궁금해 하는 한국 국민들이 많은데…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학창시절 공부도 잘 못했다. 몇 군데 대학을 떨어지고 메사추세츠공대(MIT)에 간신히 입학했다. 등산과 캠핑을 좋아해 요세미티공원에 별장을 가지고 있다. 스탠퍼드대학에서는 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동양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한국도 여러 차례 방문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KAIST 총장으로서의 새로운 생활은 적응기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한국 국민들과 KAIST 교직원, 학생들이 많이 도와줄 것으로 믿는다.”

A4용지 10장 분량 하루만에 답장

로버트 러플린 교수에게 기자가 이메일을 보낸 것은 지난달 31일 오전. 그는 하루만인 1일 오후 답장을 보내왔다. 10개 정도의 질문에 대해 그는 A4 용지 10쪽이 넘는 충실한 답변을 보내왔다. 질문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설명도 보태면서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메일을 달라"고 덧붙이는 등 친절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와 관련된 부분에는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말을 아꼈다. 그의 홈페이지(http://large.stanford.edu)에는 초기 화면에 그의 사진과 함께 한자 서예작품이 나란히 내걸려 있어 주인이 동양 문화에 친숙하거나 관심이 많다는 점을 엿볼 수 있었다. 또 그는 등산을 취미라고 소개했지만 홈페이지에 100장에 가까운 등산 및 캠핑 사진을 올려 놓아 취미 수준을 넘는 등산 마니아로 보였다.

(한국일보 200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