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환도산성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널리 회자된다. 이민족에 의해 치욕적으로 로마가 점령당하기도 했고,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이탈리아반도를 유린했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인들이 뼈아픈 패배와 숱한 역경을 극복한 결과였다.

이것은 고구려도 마찬가지다. 만주에 우뚝 서있는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의 영광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고구려는 천제(天帝)의 후손이며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사방으로 뻗어가려는 고구려의 의지에 대한 시련과 패배들이 깔려 있다.

중국 지안(集安)의 환도산성(丸都山城)은 고구려의 팽창의지와 시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산상왕은 198년 환도산성을 쌓았고 후에 이곳으로 천도했다. 동천왕 때인 246년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에 의해 환도산성이 함락됐다. 고국원왕 때인 342년에는 선비족인 연왕(燕王) 모용황이 침입해 환도산성을 함락시켰다. 광개토대왕의 영광은 이같은 위기들을 밑거름으로 하고 있다.

여호규 교수(한국외대·사학과)는 고구려를 ‘성(城)의 나라’로 설명한 바 있다. 고구려인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성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성은 군사방어와 지역거점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도성의 경우 평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비상시에는 인근의 산성으로 피난하는 방어체제를 구축했다.

고구려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국내성과 함께 고구려의 왕성으로 사용됐던 환도산성의 왕궁터 사진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중국 국가문물국이 최근 발간한 ‘2003년 중국 중요 고고(考古) 발현(發現)’이란 책자에서 확인된 것이다. 기록으로만 전해오던 환도산성 왕궁터를 고고학적 발굴로 확인시켜준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발굴이 중화주의에 입각한 동북공정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어 씁쓸하다. 우리 민족의 역동적인 생명력을 상징하는 고구려사를 학문적으로 설득력있게 되살리는 것은 오늘 우리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경향신문 200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