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푸는 우리유산] 고조선에 신지글자 있었다

근래에 발견되는 수많은 유물 등을 통해 요하지역이 황하지역보다 오래되었으며 보다 발달했다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중국의 발달된 선진 문명이 일방적으로 동쪽으로 전파되었다는 기존의 정설을 뒤집고 요하 쪽의 동이족 문명이 황화 쪽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황하유역에 살던 이른바 본래의 한족(漢族)은 농경민족으로서 북쪽에서 남하하는 기마민족인 동이족에게 밀리어 남쪽으로 쫓겨가 오늘날 중국의 남방과 동남아 일대에 살고 있다는 설명도 있다. 현재 중국은 55개의 소수 민족 중에 객가족(客家族)이 있는데 이들은 지금도 자기들이 순수 한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황하문명의 주역은 한족이 아니라 동이족이라는 설명도 가능한 것이다.

고조선 때 한반도를 포함한 우리나라 강역에서 중국의 황하 문명과는 완전히 다른 선진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파장이 국내에서조차 아직 크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선진 문명의 척도라 볼 수 있는 고유문자를 사용한 증거를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는 상형문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설형문자가 사용되었으며 이들을 사용한 민족이 선진 문명을 갖고 있었다는데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중국도 갑골문자에 이어 한자를 만들었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아세아 문명이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추론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반면에 한민족의 경우 문자다운 문자를 사용하지 못하다가 한자를 차용하기는 했으나 그것도 삼국시대에 겨우 도입되었으므로 우리의 첫 번째 국가라고 설명되는 고조선을 문명화된 국가로 볼 수 없다고 단언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와 같은 주장에는 설사 일부 청동기 문화가 중국보다 다소 앞섰더라고 하더라도 문자가 없는 한 진정한 문명세계로 볼 수 없다는 주장과도 연결된다.

그런데 근래 이런 주장을 무너뜨릴 수 있는 두 가지의 놀라운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첫째는 고조선 문자 즉 신지문자가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이 자랑하는 한자가 원래 우리의 선조인 동이족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 번 째 주장에는 중국의 국가로 알려진 하(夏) 은(殷)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라는 주장도 포함된다.

신지글자. 기사 『영변지』에 게재된 신지글자가 좌측에 보인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은 신지문자를 본떴다는 추정도 있다.
 

첫 번째 고조선에 신지글자가 있었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훈민정음 창제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주요 성원의 한 사람인 신숙주의 18대 후손 신경준은 『훈민정음운해』에서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민간에서 사용하는 글자가 있었는데 그 수가 다 갖추어지지 못하고 그 모양에 일정한 규범이 없어 한 국가의 말을 적어내기에는 모자란다고 적었다. 또한 고려와 탐라(제주도)에서도 한자가 아닌 어떤 고유글자가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덕무의 『청비록』에는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에 장유가 중국의 강남에 갔을 때 고려에서 떠내려간 ‘슬’이란 악기의 밑바닥에 쓰인 글을 중국 사람들이 읽지 못하자 그가 한문으로 옮겨 주어주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고려에 일정한 고유글자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를 강력히 반대했던 최만리는 세종대왕에게 낸 상소문에서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본래 옛 글자이지 새 글자가 아니라 하는데”라는 말과 “설사 언문이 전 왕조 때부터 있었다고 하더라도(중략) 그대로 따라 쓸 것인가”라는 말을 볼 때 그 당시 언문 곧 훈민정음이 원래부터 있었던 옛 글자를 기초한 것으로 완전히 새로 만든 글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은 종래 알려진 대로 사람의 발음기관 모양을 본뜬 것도 아니고 중국 학설을 모방한 것도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지금까지 한글의 ‘ㄱ, ㄴ, ㄷ’등 자음과 ‘ㅏ, ㅗ, ㅣ’ 등 모음은 사람의 입이나 목구멍 모양을 상형(象形)했거나 12세기 중국 문자연구서 『육서략』을 본뜬 것이란 학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카톨릭대학교의 이승재 교수는 고려시대 불경 등에 사용됐던 각필과 훈민정음의 자형이 일치되는 예가 무려 17개나 되며 고바야시는 각필 흔적은 ‘일본문헌에 나타나는 오코도점(點)의 원조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의 가나 문자가 한반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까지 연결된다.

15세기 후반기까지 전해 온 『삼성기』에 ‘단군 때에 신전(신지전자, 신지글자)이 있었다.’고 하였고 16세기 초의 이맥의 『태백일사(태백유사라고도 함)』에서는 ‘단군 때에 신지전서(신지전자, 신지글자)가 있었는데 그것을 태백산과 흑룡강, 청구(조선), 구려 등의 지역에서 널리 사용했다.’라는 글도 있다.

‘신지’란 ‘신시’라고도 표기했는데 원래 ‘큰 사람’이란 뜻을 가진 말로서 처음에는 ‘왕’을 가리켰으므로 ‘신지글자’란 ‘왕이나 지배자 즉 통치자의 글’로 해석하기도 한다. 『영변지』에서 전하고 있는 신지글자 16자는 글자의 짜임의 특성으로 보아 뜻글자가 아니라 소리글자이며 글자수가 모두 16자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신지글자 전부가 아님을 암시한다.

더구나 이들 글자가 사용되었다는 증거도 발견되었다. 평안북도 룡천군 신암리에서 발견된 토기에는 신지글자와 비슷한 모양의 두 글자가 있었고 중국의 료녕성 려대시 백람자에서 발굴된 고조선 토기에 새겨진 글자도 신지글자와 유사하다. 이들 글자는 뜻글자인 중국의 한자와도 구별되며 몽골글자와 인도의 범자와도 구별되며 마디글자인 일본 가나자와도 구별된다.

신지글자는 현재의 한글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세종실록』에 ‘이달에 임금이 어문 28자를 만들었는데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본땄다’라고 기록했고 정인지도 『훈민정음』〈해제〉에서 ‘글자는 옛 전자를 본땄다’고 했는데 ‘옛 전자’를 ‘신지글자’로 추정하기도 한다.

가림도글자.
 

한편 『단기고사(檀紀古事)』와 『단군세기』에는 고조선 3대 단군 가륵(嘉勒) 경자 2년(기원전 2181)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게 했고, 그 이름을 ‘가림도(加林多, 加林土)’라고 했다는 글이 있다. 이 38자는 훈민정음과 매우 유사하다. 또한 고대로부터 대마도에 보존되어 왔다는 ‘아비루글자’는 가람도글자에서 갈라져간 것이 분명할 정도로 유사하다.

일본의 『훈석언문해』에는 훈민정음(언문)에 대해 ‘옛날체와 지금체의 두 가지가 있었는데 옛날체는 고조선 말기에 만들어 전하는 것이고 지금체는 이조 세종 때에 옛날 글자를 고쳐 만든 것인데 지금 그 나라에는 옛날 글자는 없어지고 다만 지금 것만 쓰이는데 옛 글자는 곧 지금 일본에서 전해 온 신대글자(肥人書, 조선 사람의 글자라는 뜻)이다.’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옛날체의 글자라는 것은 곧 가림도글자를 가리키며 그것이 비인서이자 또 아비루글자 즉 신대글자라는 것을 알려준다.  

아비루글자.
 

낙랑무덤에서 나오는 벽돌에 새겨져 있는 무늬를 글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낙랑무덤의 벽돌에 새겨져 있는 무늬는 무늬의 기본 특징인 규칙성, 반복성, 대칭성이 보이지 않고 개개의 벽돌 전체에 새겨진 것들도 있고 벽돌에 하나의 요소로 삽입된 것도 있다. 이를 ‘불규칙적인 기하학적 무늬’라고 부르는데 규칙성이 무늬의 근본이므로 불규칙적인 기하학적 무늬는 결국 무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 무늬를 장식무늬라기보다는 오히려 뜻을 표현하는 글자무늬로 볼 수 있으며 그 글자무늬가 고대 고조선의 고유문자 즉 신지글자 계통의 문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우리나라에서 신지글자에 관한 충분한 자료들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책보다 주로 돌, 뼈, 청동제품에 흔적을 남겼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또 신지글자는 조선시대의 정책과도 배리되어 세조, 예종, 성종 시대에 전국적으로 금지도서로 정하고 국가적으로 회수 조치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단군 말살 정책에 의해 많은 유물과 문서들이 훼손되거나 약탈되었다는 데서도 기인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므로 앞으로 이들에 대한 자료가 발견될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갑골문자는 동이족의 유산〉

한자의 발명자가 기존의 정설인 중국인이 아니라 동이족이라는 폭탄선언이 나오게 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1993년 1월 4일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되었다.

‘중국의 약 4천3백년전 신석기시대 후기문화를 보여주는 룡산문화유적지에서 문자가 새겨진 도자기 조각이 출토돼 중국의 문자사용연대가 현재까지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아온 연대(기원전 1400년경)보다 최소한 9백년 가까이 더 올라가는 기원전 2300년경으로 판명됐다고 홍콩의 중국계 신문들이 구랍 30일 보도했다.

(중략) 현재까지 국제적으로 공인된 중국의 문자사용연대는 금세기초에 발견되 갑골문자를 근거로 기원전 1400년경의 상대 말기로 추정해왔다.

(중략) 용산 문화란 1928년 산동성 용산진에서 처음 발견된 황하강 중하류에 분포된 문화로 대략 기원전 2800∼2300년경에 황하유역에 있었던 신석기 후기문화인데, 이들 문화유적지에 많은 흑색도자기가 출토되어 흑도문화라고도 부른다.

산동대학 고고학팀이 출토해낸 도자기에 오행으로 새겨진 11개의 부호를 전문가들이 감정해 본 결과 이것들이 용산 문화 후기에 속하는 기원전 2300년경의 하왕조 이전에 사용됐던 문자인 것으로 판명됐으며 전문가들은 도구를 이용하여 숙련된 기술로 새긴 이들 문자는 그 배열에 순서가 있고 어떤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문장을 구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자연구가인 김응현씨는 '기원전 2300년이라면 고조선 시대로 특히 지금의 산동성 지역은 고조선에 포함된 지역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면서 '한자를 막연히 중국의 문자로 정의할 것이 아니라 동방문자로 재조명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서 김응현의 주장이 억지만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교육인적자원부의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고등학교 『국사』에 동이족의 분포와 고조선 강역을 나타내는 지도가 있는데 이곳에는 산동반도가 동이족의 영향권으로 들어가 있다.

고등학교 『국사』에 나오는 고조선의 세력 범위. 지금의 산동 지역이 동이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지대학교의 진태하 교수도 한자의 조상인 갑골문(胛骨文)이 동이족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언어학적인 견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은나라 때 이미 발달한 갑골문은 1899년에 출토된 이후 4000여자에 이른다. 은나라 때는 글의 뜻으로 계(契)를 사용했다. 문자의 시작은 상호약속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현재 이 ‘契’자의 소리값을 ‘계, 설’로 쓰지만 고음(古音)으로는 반절음으로서 ‘글’이었다.

문자의 명칭을 ‘글’이라고 하는 민족은 세계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오직 한국뿐이다. 특히 ‘契’자의 소리 값에서 우리말의 ‘글’이 나왔을 것이라는 반론이 있지만 이 경우 말이 먼저이지 글이 먼저일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세종대왕이 우리말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여 ‘글’이란 말이 세종대왕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세종대왕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즉 한글이란 문자를 창제한 분이지 우리말을 만든 분이 아니라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진 교수는 황하문명(黃河文明)을 이룩했던 동이족이 은(殷 또는 商)의 멸망으로 크게 약화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들 모두가 한반도를 포함하여 동쪽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황하유역에 그대로 남아 살았기 때문에 혈통적으로 오늘날 중국 민족의 상당수가 동이계라고 주장했다.

진 태하 교수는 중국이 최초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하(夏)’나라도 한국사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 교수는 그 이유로 한자는 본래 일자일의(一字一意)의 문자였으나 시대가 지나면서 의미가 확대되어 대부분 일자다의(一字多義)로 변했다는데서부터 찾는다.

우선 ‘하(夏)’ 자의 근원을 보면 더욱 뚜렷하다고 설명한다.

식물이 여름철에 성장하기 때문에 ‘하(클 하)’자가 뒤에 ‘夏(여름 하)’자로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夏)’의 자형은 갑골문에서 해서체에 이르기까지 많이 변했으나, 글자의 소리값은 ‘하(ha)’로서 상고음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데 우리말에서 ‘하(ha)’가 크다 또는 많다의 뜻으로 예로부터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夏’의 자형을 만든 것은 ‘하(ha), 크다’라는 말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 세웠다는 것이 자연스런 추론이라는 것이다.

중국학자들도 하(夏)와 은(殷)이 모두 황하 이북의 북방족 곧 동이족에 의해 수립된 나라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황하문명의 주역은 한족이 아니라 동이족이라는 설명도 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동이는 누구인가〉

기원전 3000년경에 단군의 고조선이 국가로서의 위상을 갖고 현재의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 등 중국의 동북부를 통치했다고 객관적인 자료로 인정하더라도 당시의 기록이 없으므로 추론만 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들을 중국은 동이(東夷)로 불렀다. ‘동이(東夷)’란 ‘동쪽 오랑캐’란 의미로 고대 중국인들이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이른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기초하여 그들의 동방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사용한 별칭이다. 중국 동북부에 살던 민족들이 스스로 동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나, 중국인들에 의해 동이라 불려졌기 때문에 동이는 우리의 고대사를 거론하려면 반드시 등장하는 단어로 볼 수 있다.

동이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국인들이 의미하는 중국사에서의 영토가 동쪽으로 어디까지이냐가 관건이다. 중국의 사료에 의하면 연경(燕京) 즉 오늘의 북경에서 조금 동쪽인 만리장성이 끝난 곳 즉 산해관 부근으로 추정한다. 산해관 동쪽이 동국사 즉 한국사의 영토이다.

북경 근처 만리장성인 모전욕의 설경. 진시황은 기마민족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이를 만리장성 안에 있는 민족만이 중국인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중국인들이 동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매우 오래된다. 중국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에는 은의 무정(武丁 기원전 1324∼1266)이 동이를 정벌하느냐 마느냐로 그 가부를 점친 갑문(甲文)이 있으므로 동이족이 무정(武丁)시대 이전에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사에서 동이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협의의 동이는 고대 중원의 동쪽인 산동반도와 회하(准河)유역 일대의 종족을 가리키며 광의의 동이는 한족(漢族)의 세력이 보다 확대된 진(秦)이후 중국의 동쪽인 만주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민족을 총칭한다. 그러므로 동이를 종족의 칭호가 아니라 정치적인 용어의 개념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좌전(左傳)』에 의할 경우 상(商)의 멸망은 결국 동이족 때문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갑골문, 청동기 명문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상(商, 은)이 기원전 11세기경 주족(周族)이 중심된 여러 종족의 연맹 세력에 의해 멸망하고 서주(西周)시대가 열렸다. 동이는 끊임없이 중국 역사 속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주공(周公) 단(旦)은 어린 성왕(成王)을 대신하여 섭정하였다. 단(旦)은 동이에 대한 대대적인 전쟁을 벌여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주(周)왕실의 친척과 공신을 대규모로 분봉하였다. 이때 봉해진 나라가 산동(山東)과 강소(江蘇) 지역의 노(魯), 제(齊), 초(楚) 등의 나라이다. 노나라에 살았던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등을 동이족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후 서주(西周)시대의 동이는 그들 지역에 분봉된 제후국들과 치열한 병탈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서주(西周)시대에 주(周)의 제후국과 토착민 동이 사이에 있었던 대표적인 대결이 제(齊)와 래이(萊夷), 주(周)와 회이(准夷)와의 전쟁이다. 래이(萊夷)는 중국 동부 연해 지역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한 지파로서 산동에 거주했던 토착민(주로 목축업과 농사를 지었음)이며 회이(准夷)란 준수(準水) 유역에 위치했던 종족이다.

제와 혈전을 벌였던 래이(萊夷)는 제나라 영공(靈公) 15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회이(准夷)도 노(魯)와 대립적인 관계에서 점점 밀접한 관계로 변화되며 동화되었다. 춘추(春秋)시기에는 서이(徐夷)가 등장하는데 서이(徐夷)는 산동에 존재하던 동이 중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였다.

서이(徐夷)가 한민족으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은 서언왕(徐堰王)의 설화가 고구려 주몽의 난생설화(서군(徐君)의 궁인이 임신하여 알을 낳았으므로 상스럽지 못하다 하여 강가에 버렸더니 독고모(獨孤母)의 개가 물고 들어왔다. 그가 알을 따뜻하게 하였더니 마침내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서언왕이라는 내용)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후한서(後漢書)』에 ‘서주(西周) 강왕(康王) 때 서이(徐夷)가 스스로 왕임을 천명했다. 그는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종주(宗周)를 쳐서 황하의 상류까지 이르렀으며 국토가 사방 500리에 달했고 조회하는 나라가 36국이나 되었다.’라는 기록을 볼 때 당시에 매우 강성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임승국은 서언왕이 주나라 목왕(穆王, 기원전 1001∼947)과 일대 결전을 벌렸는데 이 당시 서언왕이 할거한 곳은 회수(淮水)와 대산(垈山)사이의 회대(淮垈) 지역으로 중원 대륙에서 가장 기름진 평야라고 설명했다.

중국 문헌에서 동이는 ‘이(夷)’, ‘동북이(東北夷)’, ‘구이(九夷)’, ‘구려(九黎)’, ‘사이(四夷)’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동이보다 이(夷)가 먼저 일반화된 것은 이(夷)가 어떤 특정한 민족을 가리킨 고유명사가 아니라 고대 중국인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이질집단을 통틀어 부른 명칭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인들은 문화가 높은 지역을 ‘하(夏)’, 문화가 높은 사람 혹은 종족을 ‘화(華)’라 칭하고 화하(華夏)가 합해져서 중국이라 칭했다.

여하튼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산동의 동이들은 점점 중국인들에게 밀려 점점 제후국에 예속되면서 그들의 고유의 문화는 중국 문화에 흡수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과정을 완성시킨 사람이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이다. 그는 중국 천하를 통일시켜 전국(戰國)시대를 마감시키면서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이전까지의 국가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통일 제국을 세웠다.

진시황제가 통일한 중국 영역은 동으로는 조선(朝鮮), 서로는 임 조 강중, 남으로는 북향호(北嚮戶), 북으로는 황하의 북단, 동북은 요동과 국경을 접하는 거대한 영토로 오늘날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서주(西周)시대부터 중국인들에게 동화하기 시작한 중국 대륙 안의 동이들은 진나라의 출현으로 중국민족으로 완전히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수연 박사는 한대(漢代)이후 동북지역에서 나타나는 동이를 그 이전 시기 산동 일대에서 존재했던 동이와 같은 계보로 묶을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하와 은나라는 후대에 중국에 동화되어 중국인으로 자리잡았으므로 이들 국가를 동이족이 원류인 한민족이 세웠고 한자도 동이가 살던 산동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자 역시 ‘한민족이 만든 것과 다름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약 중에서도 비약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이런 주장은 중국의 북방에서 생성된 이(夷)집단이 한 파는 산동으로 내려가고 또 다른 한 파는 동쪽으로 나와 만주 일대에 분포되었다는 견해들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동이(東夷)가 동쪽의 오랑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동쪽의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夷)자는 원래 활은 평상시에 활줄을 빼놓았다가 유사시에 걸어서 쏘는 생활을 한 사람들의 상형자라는 것이다.

고대사에 대한 연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우리의 고대사는 이제 시작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감안한다면 이 분야는 앞으로 보다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계속 우리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줄 것으로 생각된다.

<이종호/과학저술가>

(국정브리핑 2004-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