脫美近中의 末路

현 정권의 親대륙정책, 진정한 반도국가의 길과 달라

주한미군 3,600명이 이라크로 간단다. 그들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지 여부는 이제부터 논의해 봐야 안단다. 그러나 이 같은 사태전개를 즐기는 이든 불안해하는 이든 그들이 원위치할 것이라고 바라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러니 주한미군이 떠나간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정부는 주한미군 이동이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계획(Global Defence Posture Review)에 의한 것으로 한국에만 적용되는 특수사항이 아니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자주국방 실현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들은 정부의 이러한 말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현재와 같은 경기침체 속에서 자주국방을 추진할 여력이 있느냐 하는 회의다. 노무현 대통령은 작년 8.15 기념사에서 2만 달러와 자주국방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제시했다. 둘 다 좋은 얘기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자주국방을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하는데 그 돈이 고용창출과 생산증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재원이 넘쳐흘러 자주국방을 위한 국방예산 증대와 경기활성화를 위한 예산 증액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몰라도 이 둘은 동시에 추진하기 힘든 과제다. ‘이태백’을 구제하기 위한 정부 보조금과 국방예산은 상호 경쟁관계에 있다.

둘째, 설령 경제상황이 호전되어 자주국방을 위한 재원마련 여건이 나아진다 할지라도 현재와 같은 한미관계에서 예측 가능한 자주국방 추진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미일동맹과 달리 한미동맹은 미군의 재배치 및 이동에 관한 사전협의를 제도화해 놓지 못했다. 이번 3,600명 차출을 처음 통보받은 것은 5월 14일로 불과 3-4일에 걸친 논의과정을 통해 한국정부는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앞으로도 주한미군이 언제 어떻게 변화될지 한국정부가 사전에 모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주국방에 대한 치밀하고 체계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할 수 있겠는가?

현 정부는 한미관계에 이상이 없음을, 따라서 안보 공백이 생기지 않을 것임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캠벨 주한 미8군 사령관은 25일 미국의 안보 공약에 변화가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외교적 수사(rhetoric)에 불과할 뿐이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 때문에 한미동맹을 유지는 할 것이나,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이미 정설(定說)로 굳어지고 있다. 한국은 미국에게 ‘의심스러운 친구(suspicious friend)’가 되어버린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은 노 대통령이다. 후보자 시절의 “반미면 어떠냐”는 논외로 치자. 대통령이 되어 미국을 다녀온 다음에도 표현방식만 바뀌었지 그대로였다. 작년 11월 노 대통령은 “미국이 세고 강하지만 자존심이 상할 만큼 종속적이지는 않다”며 10년 안에 자주국방을 할 것이며 대미관계도 변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에 덧붙여 “미국에 조금 속이 상하더라도 대승적 견지에서 손을 꽉 잡고 가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미국은 바보가 아니다. 한국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시적으로 꽉 잡는 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10년 후에 쫓겨날 것을 알면서 가만히 있을 미국인가? 이처럼 현 정권은 자주국방을 추진할 능력도 안 되는 상태에서 脫美를 추구하여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반면 중국에 대해서는 대단히 우호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17대 총선 당선자의 63%가 중국이 한국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라 답했다. 현 정권 외교안보정책의 실세인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차장은 차관급임에도 불구, 최근 중국방문에서 리자오싱(李肇星) 외교부장을 만나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처럼 한중관계는 東北工程에 의한 고구려史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 좋아 보인다.

이 모든 것은 현 집권세력이 추구하는 외교방향이 脫美近中임을 말해준다. 이는 대륙국가의 길이다. 이제껏 우리는 분단으로 인한 ‘반도성(半島性)’의 상실로 해양국가의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외국여행을 해외여행이라 불렀다. 통일은 ‘반도성’의 회복을 뜻한다. 지정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통일은 해양국가 남한과 대륙국가 북한이 반도국가로 하나 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 정권은 이 과정에서 이 나라를 脫美시켜 대륙국가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진정한 반도국가의 길과 거리가 멀다. 남북이 통일되어 승승장구하고 있는 중국경제와 호흡을 같이 한다면 미국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먹고 살수 있다는 것이 이러한 발상의 계산법이다.

그러나 이는 망조로 가는 길이다. 동아시아의 냉전종식은 자본주의 해양세력(한국 미국 일본)의 사회주의 대륙세력(북한 중국 소련)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중국의 개혁개방, 러시아의 시장경제 전환은 그들이 뒤늦게라도 해양세력의 시스템을 도입하여 번영의 길을 걷겠다는 의사표현이다. 수천 년에 걸친 한중관계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한국이 중국보다 이렇게까지 차이 나게 잘 살았던 것은 최근 역사가 처음이다. 한국이 해양세력에 속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듯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확산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볼 때, 우리의 통일은 해양세력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면서 대륙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반도국가의 길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 정권은 해양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대륙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이 나라가 중국의 변방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19세기 이전질서로의 복귀다. 피억압민족의 해방을 외쳤던 마오쩌둥(毛澤東)조차 속국이라 불렀던 東夷의 나라가 脫美近中의 末路가 될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취업비자를 얻기 위해 중국대사관 앞에 줄을 서고, 명동에 중국인 전용 발마사지 숖이 생길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脫美近中의 과정에서 우려되는 것이 있다. 미국이 조용히 물러나 주겠냐는 것이다. 97년 말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이했을 때, 대처방향을 놓고 미 정부 내의 의견이 갈렸다. 시장에 맡겨 두자는 재무부의 의견과 그럴 경우 채무불이행(default)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한국이 지닌 외교안보상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는 국무부의 주장이 대립하였다. 결과는 IMF 긴급차관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脫美近中을 지향하는 나라가 되어버린 지금, 미국이 과연 경제외적인 배려를 지속할는지 의심스럽다. 경우에 따라 한국은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미국의 영향력에 주눅이 들어 하는 말이 아니다. 자주를 할 실력도 갖추어 놓지 못한 채 자존심만 앞세우고 있는 세태가 우려돼서 하는 말이다. 도대체 지금 이 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신지호 논설위원>

(업코리아 2004-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