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 요서·패수

대무신왕이 숨지자 동생 해색주(解色朱)가 임금이 됐는데, 곧 민중왕이다. 민중왕은 얼마 안 되어 숨지고 대무신왕의 맏아들 해애루(解愛婁)가 모본왕이 되었다. 한나라가 낙랑국을 쳐들어 온 지 다섯해 만인 서기 49년, 모본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쳤다. 요동태수가 간청하여 양쪽은 다시 화친하였다. 사람됨이 포악한 모본왕은 사람을 깔고 앉거나 베고 잤는데,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베어 죽였다. 이를 말리는 이는 활로 쏘아 죽이니 ‘두로’가 왕의 목을 베고 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 재사의 아들, 궁(宮)을 임금으로 모셨는데, 바로 태조대왕이다. 똑똑했으나 일곱살인지라 태후가 발을 치고 정사를 돌봤다. 다음해인 서기 55년 봄 2월에 요서(遼西)에 성 10곳을 쌓아 한나라가 쳐들어올 것을 대비하였다.

모본왕·태조대왕 때 기록을 보면, 한나라의 위력은 그리 세지 않아 고구려가 이미 요서는 물론, 베이징 서쪽 지역까지도 쳐들어갔다. 요하 서쪽 험독현(거미달)이 요동군에 드는 것으로 보아 요동군, 요서군의 경계는 요하 아닌 패수(沛水), 지금의 ‘대릉하’(大陵河)였다. 〈한서지리지〉를 보면, 요서군에는 열두 현이 있었다. 요서에 쌓은 10성이 요서군에 있었다면 고구려가 한나라 요서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는 말이며, 한나라 요서군은 허울뿐인 지역 편제였을 수 있다.

서쪽(서방)은 고구려·신라말로 ‘압·아벌’(押·阿火)이다. ‘요서’는 고구려말로 ‘오라압’쯤이었다. 앞서 패수(沛水)는 지금의 대릉하다. 또다른 패수(浿水)는 예성강 또는 대동강을 가리켰으며, 패수(浿水)는 당시 말로 ‘바이모로’였다. 이 두 패수가 같은 걸 가리킬 때도 있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한겨레신문 2004-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