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장군총은 ‘장군묘’ 아닌 ‘황제무덤’

서길수 교수, 1910년대 한국인이 찍은 장군총 사진 공개

오늘 아침 서길수 교수(서경대, 고구려연구회 회장)가 한 통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고구려 장군총을 1910년대 조선족이 찍은 것이라 한다. 감개무량한 사진 한 장이다. 서 교수는 한국인이 찍은 최초의 장군총일 것이라며 특히 장군총을 당시는 ‘황제무덤’으로 불렀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메일 내용을 소개한다. 편집자
  
  며칠 전 중국의 조선족으로부터 한 장의 사진이 배달되었다. 낯익은 장군총에 1백57명이나 되는 조선족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단체사진이다. 장군총 위에 숲처럼 우거진 나무들을 바라보는 순간 필자는 사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 사진은 한국인이 고구려 유적을 찍은 최초의 사진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학생들로 보이는 95명의 남녀 아동들은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짧은 머리나 빡빡 깎은 머리를 한 남자아이들은 단추 여섯 개가 촘촘한 교복을 입었고, 단발머리 여학생들은 대부분 한복을 입었다. 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소학교 학생들 소풍 사진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모자와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중학생, 두루마기나 양복을 입은 어른, 어린아이를 안은 아낙네들, 치마저고리에 수건을 머리에 두른 할머니 등 50명이 넘은 학부형들이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소풍에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나왔을까?’‘온 동네 사람 모두가 단체사진을 찍은 것일까?’ 하는 여러 가지 의문을 낳게 하였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것일까? 사진을 보낸 허창흘(길림성 유하현)씨는 적어도 1백10년 전의 사진은 될 것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이 사진이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인데 “할아버지께서는 80을 계기로 세상을 하직하였사옵는데 저는 그 이듬해 출생자로서 금년 제가 66세이오니 2004년에 할아버지 연세는 1백46세로 추측이 됩니다. 그러하오니 할아버지는 1859년 태생으로 사진기가 세상에 발명된 지 10년 후 35세 전후에 찍었다 해도 이 사진은 1백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봅니다”고 하는 것이다.
  
  1백10년 전이면 1894년인데, 필자가 보기에는 그렇게 빠를 수는 없다. 국내성이 있는 집안은 청나라에서 봉금지역으로 선포한 지역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인적이 끊긴 상태였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02년 집안현이 성립되면서부터이다. 일본인 학자가 국내성을 조사할 때 “1905년 가을 내가 이곳을 지날 때는 거칠고 넓은 성곽 한 가운데 현의 아문이 있고 그 가까운 곳에 30호쯤 되는 마을밖에 없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1905년 이전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없다.
  
  허창흘씨는 “할아버지(허천학, 허운학, 허인학 형제)는 1912년(?) 3.1운동 때 독립자금을 만들기 위해 위조지폐를 만들다 붙잡혀 3년 감옥살이를 하다 풀려났다고 하나 그 뒤 행적이 없다“고 한다. 3.1운동이 1919년 일어난 것으로 보아 이 사진은 할아버지가 감옥에 가기 전인 1919년 이전에 찍은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늦게 잡아도 일제시대에 찍은 것은 확실하다. 일본 학자들이 현지를 답사하면서 찍은 사진은 있지만, 또 일제시대에 출판한 책에 소개되었지만 한국인이 이처럼 이른 시기에 고구려 유적을 찍은 사진이 나타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허창흘씨 편지에 “사진의 내용인 즉 길림성 집안시 고구려 황제무덤을 배경으로 하여…” “원래는 집안이란 집자가 ‘輯’이고 6.25 동란 후 지금의 ‘集’자로 고치고 황제무덤을 장군묘로 고쳐 썼습니다”고 하여 현지 조선족들은 “장군묘는 황제무덤”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황제무덤을 장군묘로 바꾼 것이 6.25 이후의 일은 아니지만 집안의 고구려 무덤을 ‘황제무덤’이라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18세기 전반에 제작한 해동지도에는 국내성을 오국성이라고 표기했고 그 옆에 분명히 황제무덤(皇帝墓)이라고 표시하였다(아래 그림 참조).
  

  최근 중국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장군총은 장수왕릉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분명히 장군의 무덤은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빛을 낸 왕의 무덤을 황제무덤이라고 부르지 않더라도 그 위상을 깎아내려 ‘장군의 무덤’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한 장의 사진과 편지이지만 우리 교과서의 잘못을 일깨워주는 값진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서길수/서경대 교수ㆍ고구려연구회 회장>

(조선일보 2004-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