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 기행] <10> 을파소의 등용과 고국천왕
을파소는 서기 191년부터 13 년 간 9대 고국천왕과 산상왕을 모신 고구려에서 제일 가는 현명한 국상이었습니다. 국상은 신하들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조선 시대 영의정과 같은 관직이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을파소는 국상에 임명되기 전까지는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던 농부였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국상이 될 수 있었을까요?

◈ 귀족의 반대에도 농부를 국상으로 등용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갑자기 크게 등용하는 사례가 ‘삼국지’에 나옵니다. 떠돌이 무사 집단의 지도자였던 유비가 삼고초려 끝에 제갈량을 만나 촉나라를 세운 이야기지요.

하지만 고구려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한 사건은 이보다 16 년 전의 일이랍니다. 게다가 고국천왕은 확고하게 정비된 국가 조직과 많은 귀족들을 거느린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따라서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한 것은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한 것보다는 더 큰 결심과 더 뛰어난 사람을 보는 판단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농부를 국상으로 임명하여 성공한 고구려에서의 사례가 서쪽으로 전해져서 유비로 하여금 제갈량을 등용하도록 결심하는 데 자극이 된것은 아닐까요? 고국천왕은 왕이 된 지 13 년 되던 해에 정치를 바로잡고자 새로운 인재를 추천하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추천한 사람은 을파소가 아니라 안유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유는 높은 관직을 맡아서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이를 사양했습니다. 그 대신 자기보다 더 능력이 뛰어난 을파소를 천거했습니다.

고국천왕은 오로지 안유의 말을 믿고 을파소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그에게 지금의 장관에 해당되는 중외대부 관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을파소는 중외대부직을 사양했습니다. 올바른 정치를 하려면 중외대부라는 직책으로는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이를 사양했던 것입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난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진정한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국상에 임명했습니다.

시골 농부를 국상으로 삼은 파격적인 조치는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귀족들은 왕에게 을파소를 비난하며 그를 국상직에서 쫓아 내려했습니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한번 결심한 이상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고국천왕은 사람의 출신을 보지 말고 사람의 능력을 믿으라면서 귀족들에게 을파소를 믿고 따르라고 명령했습니다.

◈ 대대적인 개혁에 나선 을파소

국왕의 절대적 믿음을 받은 을파소는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교육 제도를개편하고 부정 부패 방지, 인재 선발 활성화, 진대법을 비롯한 경제 정책개혁 등을 통해 정치를 바로잡아 고구려를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진대법은 고구려가 가장 먼저 실시한 제도입니다. 식량이 부족한 3월에서 7월까지 나라에서 농민에게 곡식을 빌려 주고 10월에 되돌려 받아 백성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했습니다. 진대법의 실시로 농민들은 보다 안정적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조선 시대에 농민을 구제하는 제도인 환곡과 11세기 송나라의 개혁적 정책이었던 청묘법은 고구려의 진대법을 본받아 시행된 것이랍니다.

고구려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소문이 나자 이웃 나라 농민들이 고구려로 자진해서 넘어오기도 했답니다. 백성들이 모이자 고구려는 더욱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을파소는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고구려 최고의 명재상이었습니다. 그가 죽자 고구려 사람 모두가 진심으로 슬퍼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1800 년이 지났지만 고국천왕과 안유, 을파소를 생각해 봅시다. 을파소와 같은 훌륭한 인재들은 여러분의 친구들 가운데에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을파소와 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을까요? 고국천왕과 같이 널리 인재를 구하고, 한번 믿은 인재를 끝까지 밀어 준 사람들이 없다면, 또 안유와 같이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기회를 양보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국상 을파소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보다 어떤 부분에 능력이 뛰어난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울 때, 그 친구도 내 능력을 인정하고 나를 도울 것입니다. 서로를 질투하기보다는 서로의 능력을 함께 발휘할 수있도록 도와 준다면 우리 나라도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을파소와 같은 뛰어난 인재도 필요하지만, 고국천왕이나 안유와 같은 사람들이 더욱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일보 200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