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를 되찾자]명동촌은 민족정신의 용광로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통령은 '간도 대통령' 김약연이다."

두만강 너머 겨레의 첫마을 명동촌(明東村). 동쪽을 밝힌다는 뜻을 담고 있는 명동촌은 1899년 문병규-남도천-김약연-김하규 등 네 가문의 집단 이주로 만들어진 정착촌이다.(윤동주 시인의 일가는 1년 뒤인 1900년 명동촌에 이주했다) 명동촌 사람들은 간도를 '사이섬'으로 부르지 않았다. 개간할 간(墾)을 쓴 간도(墾島)라고 부르며 우리 민족이 개간한 땅이자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김약연을 동만의 대통령이라 불러

1912년 김약연을 중심으로 결성된 간민회(墾民會)도 같은 의지를 담고 있다. 간민회 결성을 주도한 사람은 규암 김약연. 그는 간민회 결성 후 중국의 실권자 원세개와 담판하여 자치권을 인정받는다. 1909년 불법적인 간도협약으로 간도의 영유권이 중국으로 넘어간 상태였지만 중국 스스로 간도의 주인이 우리 민족임을 인정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집단으로 들어가 살아 간도를 우리 땅으로 만들자'는 이주민들의 목적이 실현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후 중국인들은 명동촌의 김약연을 동만의 대통령, 즉 간도 대통령이란 뜻인 '한꿔릉'이라고 불렀다.

명동촌 사람들에게는 뚜렷한 이주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생존문제 해결이었다. 생존이 급박한 문제이기는 했지만 결코 서두르지는 않았다. 이들은 우선 선발대를 보내 땅을 구입하고 터를 닦았다. 이주한 다음에는 산림을 개간했다. 이런 노력으로 명동촌은 1899년부터 1905년까지 약 6백만평에 이르는 큰 마을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한편 이주민들은 개간을 통해 간도가 민족의 영토임을 확실히 인식하게 됐다. 땅을 파헤칠수록 쏟아져 나오는 우리 민족의 유품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척박하고 비싼 조선 땅을 팔아 기름진 땅을 많이 사서 잘살아보자'는 약속은 차분하게 지켜졌던 것이다.

이런 소식들이 전해지면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망명길에 오른 애국지사들이 명동촌으로 모여들었다. 안중근 의사도 명동촌에 머물며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한 사격연습에 몰두했다고 한다. 이렇게 명동촌은 독립정신이 충만한 성지로 자리를 잡았다.


명동촌 선각자들은 '기울어 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 세울 인재를 기르는' 교육을 서둘렀다. 네 가문을 이끌던 '리더'들이 전부 한학자 출신이었기에 명동촌에는 오룡재-규암재-소암재 등 서당이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다. 이 가운데 1901년 문을 연 김약연의 규암재는 1908년 명동학교 설립의 밑거름이 된다.



북간도 근대교육의 시작은 이상설의 서전서숙이었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 파견이 문제가 됐다. 일제의 간도파출소가 이를 문제삼아 압박을 가해왔고 서전서숙은 폐교되는 운명을 맞았다. 김약연은 명동촌의 서당들을 합쳐 서전서숙의 정신을 잇는 명동학교를 열었다.


명동학교는 당시 본국에서도 보기 드문 신식교육기관이었다. 이미 1910년대에 브라스 밴드가 있는가 하면 테니스 코트까지 갖추었을 정도다. 무엇보다 명동학교의 교육은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에 밑거름이 되었다. 명동학교는 간도에 문을 연 20여개 학교 가운데 가장 많은 교사를 두고, 역사-법학-외교-통역-병식훈련 등의 과목들을 가르쳤다. 민족자존의 인적-물적 자원을 공급하는 상수원을 만들려는 김약연의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명동촌에 개혁을 몰고 온 기독교

명동촌에 가장 큰 변화를 몰고 온 것은 기독교였다. 1909년 명동학교 옆에 명동교회가 들어서게 된다. 명동학교 교사로 부임해온 정재면의 전도를 받은 김약연의 결단이었다. 기독교는 명동촌에 개혁의 바람을 몰고 왔다. 여성들에게 한문으로 된 이름을 짓게 했다. 고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인 김신묵 여사도 이때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름 첫자에 모두 믿을 신(信)자를 넣어서 지었는데 이는 한 항렬의 형제가 되자는 평등사상의 구현이었다. 1911년에는 명동촌에 명동여학교가 들어서서 여성들도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1919년 3월 13일은 명동촌의 운명이 결정되던 날이다. 용정 벌판에 8천여명의 간도 주민이 운집했다. 가슴에는 태극기를 품고. 2백리 떨어진 마을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국내에서 전해진 3-1운동 소식이 간도 이주민들의 가슴에 불덩이를 얹어놓았다. 명동촌의 지도자들과 명동학교의 브라스 밴드가 앞장을 섰다. 만세소리 드높던 이 날 일제의 총탄에 주민 3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듬해 1월에는 조선은행의 자금을 명동촌 입구에서 강탈한 '15만원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일제의 간섭과 감시는 극에 달했다.

청산리 전투가 있기 하루 전인 1920년 10월 20일, 명동촌은 결국 일본군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말았다. 이른바 '경신대참변'이다. 명동학교는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1922년 명동학교는 복구됐지만 재정난을 견디지 못하고 1925년 2월 문을 닫고 말았다. 그리고 명동학교 재학생들은 용정의 은진중학으로 전학했다. 25년간 간도의 중심이던 명동촌도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후손들 지금 뭐하나"

나는 압록강을 국경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방금 우리가 지나친 곳이 다 우리 선조들의 생활권인 발해 문화권이요, 저 아래는 고구려 유적지거든."

1989년 평양을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고 문익환 목사가 일행에게 건넨 말이다. 통일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투신해 일생을 불살랐던 늦봄 문익환 목사. 그는 명동촌에 정착한 문병규의 증손이다. 그의 아버지 고 문재린 목사 역시 명동촌과 용정에서 민족교육에 앞장선 인물로 유명하다.

고 문익환 목사의 오랜 친구인 윤동주 시인은 명동촌에 정착한 윤재옥의 증손이다.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인 혜원씨는 현재 호주에 생존해 있으며, 조카 윤인석 교수(성균관대 건축학과)와 6촌 동생인 가수 윤형주씨가 가문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김하규의 후손으로는 증손인 김동흡 은진중학 총동문회 이사가 있다. 명동촌을 일군 다섯 가문 가운데 남위언 일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한에 정착했다. 서로 멀고 가까운 친척이기도 한 이들은 지금도 연락을 하며 지낸다.


명동촌 역사 정리하는 김약연의 증손

"1990년 처음 명동을 찾았는데 우리나라를 떠나 명동에 도착할 때까지 무려 12일이나 걸렸습니다."

'간도 대통령' 김약연의 증손인 김재홍씨의 말이다. 한-중 수교 이전이라 서울을 떠나 홍콩, 북경, 심양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커다란 기대를 품고 떠난 길이지만 재회의 기쁨보다는 안타까움만 마음 가득 담고 돌아와야 했다. 수십년 세월이 명동촌의 면면을 대부분 파괴했기 때문이다. 명동촌을 내려다보던 선바위를 제외하면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명동교회 건물은 정미소가 됐고 명동학교는 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곳 분들이 할아버님은 기억하면서도 명동교회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하더군요." 문화혁명의 광풍이 스쳐간 탓이었다. 김약연의 행적을 적은 기념비도 깨진 채로 반쯤 땅에 파묻혀 있었다. 그가 전하는 명동촌의 요즘은 더욱 절 망적이다. 중국에 부는 개발바람이 명동촌에도 불어닥치고 있다. 최근에는 명동촌 뒤쪽으로 큰 길이 뚫렸다고 한다.

그는 명동촌의 남은 유적을 보존하력 애쓴다. 그동안 세계 각지를 누비며 당시의 자료들을 찾아 모으고 분류했다. 현재 알려진 명동촌의 사진들은 모두 그에게서 배포된 것들이다. 윤동주 시인의 사망일시도 그가 발굴한 사진자료를 통해 세간에 알려졌다. 이번 기사에 쓰인 사진들도 모두 그가 제공한 것이다.

그는 이제 명동촌의 역사를 차분하게 정리하고 싶어한다. 더 시간이 지나면 명동촌과 그들의 민족정신이 영원히 묻혀버릴 거라는 염려 때문이다.

(뉴스메이커 2004-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