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처음엔 무관심, 日승리 보이자 잇권다툼

청일전쟁 시기 서구열강 태도
日 승전국 특권에만 큰 관심

서구 열강은 청·일 두 나라 사이에 본격 대립이 발생하자 겉으로는 전시중립(戰時中立)을 표방하면서도, 어느 쪽을 편드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가를 냉철히 계산하였다. 또 전쟁의 불똥이 자기 나라 이해가 걸린 지역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과 러시아, 영국은 조선으로부터 청·일 양국 군대의 철병과 전쟁 방지를 위한 중재 활동을 요청받았지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한반도에서 중국 대륙으로 확산되자, 이들은 전쟁 종결과 강화 협상을 위해 중재에 나섰다. 일본이 얻게 될 중국 내 특권과 조차지(租借地)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러시아는 일본군의 조선 파병이 궁극적으로는 만주 진출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래서 러시아는 1894년 6월 청일 전쟁이 벌어진 직후 청·일 군의 공동 철수를 제의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다. 리훙장은 러시아의 개입을 기대했지만, 러시아는 개입하는 대신 중재의 대가로 실리를 챙겨 나갔다. 만주 지역에 진출하려던 러시아는 일본의 랴오둥(遼東) 반도 획득에 반대하여 독일, 프랑스와 함께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에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중국의 현상 유지를 희망했던 독일과 프랑스는 일본 측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특히 프랑스는 동양 평화를 위해 장차 일본과의 동맹 체결 의사를 시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아무런 협의 없이 제물포의 외국인 조계지에 주둔하자, 주한 프랑스 및 독일 공사는 러·미·영 공사와 공동으로 일본군에 항의하였다. 그후 러시아의 삼국간섭 제의에 대해, 러시아와 동맹 관계에 있는 프랑스는 처음부터 행동을 같이하기로 했다. 그리고 독일은 일본의 강화 조건이 자국의 중국 진출에 방해가 되며, 러시아와의 협력 관계가 유럽에서도 유지될 필요성을 느껴서 러시아의 대일 견제에 동의했다.

한편, 동북아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했던 영국은 누가 더 러시아를 견제할 능력을 가진 파트너가 될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었다. 영국은 무능한 중국보다 신흥 군사 강국 일본에 보다 많은 기대를 걸었다. 영국은 1894년 7월 조선에 대해 청·일 양국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일본 정부의 제안을 청 정부에 전달하였다. 이러한 중재 노력이 리훙장에 의해 거절당한 후, 영국은 일본의 승리를 내심 기대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과의 협력 관계 및 대(對) 중국 진출을 고려하여 처음부터 전시 중립과 불개입을 표방하였다. 조선 정부는 1882년 조미(朝美) 수호조약에 명기된 중재 조항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당시 그레샴 국무장관의 반응은 형식적이며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반면 실(Sill) 주한 미국 공사는 서울 주재 서구 외교관들과 공동 보조를 취하면서 일본군의 불법 행동에 항의하고 고종의 신변 보호를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이러한 주한 미국 공사의 외교활동은 본국 정부의 제지로 제한되었지만, 당시 고종과 조선 정부가 미국에 커다란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하였다. 승승장구하는 일본의 승리가 확연해지면서 1894년 11월 미국의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중재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후 미국은 강화 협상에 이르기까지 청·일 간 교섭창구의 역할을 자처하였다.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한국외교사>

(조선일보 2004-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