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지역전문가 없는 한국

최근 중국은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하기 위해 온갖 열을 올리고 있다. 고구려가 중국 영토에서 건국했고 시종일관 중국왕조에 신속했다고 주장하더니, 급기야 고구려의 조상마저 한족(漢族)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더욱 놀랄 일은 수(隋)나 당(唐)의 고구려 침공을 중화민족 내부의 통일전쟁이라고 파악한다는 점이다. 만약 이러한 주장을 용인한다면, 612년 살수대첩이나 645년 안시성전투는 더 이상 우리 전쟁사의 한 페이지로 기술할 수 없게 된다.

수나 당의 고구려 원정은 명백히 독립국가에 대한 침략전쟁이었다. 수가 수 백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정벌하다가 결국 멸망한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고구려가 당의 침공에 대비해 서북 국경에 천리장성을 축조한 사실도 이를 잘 나타낸다. 국가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면 어떻게 수 백만 대군을 동원하고, 국경에 거대한 방어벽을 축조했겠는가.

그러면 우리 시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고구려와 수ㆍ당의 전쟁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살수대첩이나 안시성전투를 상기한다. 그러면서 을지문덕이나 양만춘 장군의 활약으로 수나 당의 대군을 물리친 사실을 강조한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고구려의 승리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리 온당한 태도라고는 할 수 없다. 중국 학계가 자신의 입장만 강조한 것처럼 우리도 수나 당의 상황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경우 일시적 승리감을 맛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역사적 교훈을 얻기는 힘들다.

수와 당의 고구려 원정을 비교해보면 많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수 양제는 온국력을 기울여 고구려 정벌을 준비한 다음, 612년 300만여 대군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다. 양제는 대군을 이끌고 가기만 하면 고구려를 손쉽게 멸망시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 맞딱뜨린 고구려 요동성은 너무나 견고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 여러 달 공격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보니 군량미도 제대로 조달되지 않았다. 다급해진 양제는 30만 별동대를 편성해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그렇지만 이 별동대도 을지문덕의 유인전술에 걸려 살수(청천강)에서 전멸당했다.

수 양제는 613년과 614년에도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그 때마다 612년과 똑같은 전략을 구사했다. 물론 원정 결과도 612년처럼 무참한 실패로 끝났다. 수가 멸망 하는 그날까지 양제는 대군만 끌고가면 고구려를 정복하리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 했다.

반면 당은 수와 전혀 다른 전략을 구사했다. 당은 고구려 정벌에 앞서 진대덕을 사신으로 파견해 고구려의 군사시설과 자연지세부터 샅샅이 정탐했다. 이를 통해 고구려가 물샐 틈 없는 성 방어체계를 바탕으로 청야수성전(淸野守城戰)과 유인 전술을 구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당군은 645년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등 요동 일대 성을 차례로 격파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물론 수많은 성곽을 몇 달 만에 모두 함락시킬 수는 없었고, 결국 안시성에서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퇴각해야 했다. 그렇지만 당은 고구려의 방어체계를 정확히 파악한 결과 피해를 최소화하며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처럼 수가 자신의 국력만 믿고 무모하게 고구려 정벌에 나선 반면, 당은 고구려 내부 사정부터 파악한 다음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그 결과는 천양지차(天 壤之差)였다. 상대방의 내부 사정을 얼마나 정확히 파악했느냐가 결국 국가의 명운(命運)까지 좌우했다.

그러면 지금 우리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는 중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정세를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가. 중국측 연구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기관 조차 없었던 것이 우리 현실이다. 2001년 아프카니스탄 전쟁 때는 그 지역 전문가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이러고서도 세계 11위 경제대국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 동안 수ㆍ당과의 전쟁을 고구려 입장에서만 보아온 것처럼 우리는 세계 각국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너무나 등한히 했다. 이렇게 해서는 21세기 세계화의 험난한 파고를 넘기 힘들다.

물론 당처럼 침략주의적 관점을 가져서는 곤란하다. 그렇지만 세계 여러 나라와 더불어 공존공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대방을 올바르게 이해해 협력의 밑바탕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 투자하는 것 이상으로 정치 경제 역사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세계 각 지역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온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여호규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

(매일경제 200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