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中 고대史 전쟁] <11>동북공정의 논리 ⑦발해는 당의 지방??

중국 학계는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며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있다. ‘신당서(新唐書)’ 등의 사서에 근거해 발해가 국호를 당으로부터 받았고, 발해는 당의 홀한주도독부(忽汗州都督府)로 왕이 도독 등의 책봉을 받았다는 설명이다. 또 발해는 당나라에 끊임없이 조공했던 기미주(羈縻州)의 관계였고, 문화적으로도 한자를 사용하며 당 중심의 문화를 향유한 왕조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 발해의 국호ㆍ책봉관계 자의적으로 해석

발해가 당으로부터 국호를 받았다고 해서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당으로부터 국호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견강부회다. 당으로부터 국호를 받았다는 논리는 신당서에 ‘말갈(靺鞨)’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발해’라고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발해라는 국호를 당에서 내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발해는 개국 때부터 ‘진국’ 또는 ‘발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말갈’이라고 낮춰 부르는 이름을 국호로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말갈에서 발해로 국호를 바꾸어 부른 것은 당나라의 현실적 판단에 따른 일방적 외교행위이지, 당이 발해라는 국호를 내린 것은 아니다. 이후에도 당은 자주 발해를 말갈로 낮춰 불렀다.

대조영을 비롯해 많은 발해의 왕들이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발해가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발해를 비롯한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에 대한 당의 책봉행위가 곧 속국이나 지방정권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에속한다. 당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책봉은 양국간의 ‘외교적 승인행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공 역시 동아시아의 관영무역 차원에서 보는 것이 이미 오래 전부터 학계의 정설이다. 조공은 주변국들이 선진적인 당으로부터 경제ㆍ문화적 이익을 취하기 위한 무역과 외교행위 이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발해는 국제적이며 선진적이었던 당 문화를 조공사를 파견해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발해와 당 사이에 있었던 책봉과 조공은 비록 그 주도권이 당에 있다고 할지라도, 중앙과 지방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엄연히 왕조 대 왕조로 이루어진 국제적 외교행위였다.

▲ 독자 연호 사용, 종족도 고구려 계통

발해는 독자적으로 연호나 시호(諡號)를 사용하였다. 이를 두고 신당서는‘사사롭다(私)’고 할 정도였다. 발해는 또한 황상을 자칭하는 황제국이었다. 정혜공주 묘비(780년)와 정효공주 묘비(792년)에는 두 공주의 아버지인 문왕이 대왕(大王), 성인(聖人), 황상(皇上)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정효공주묘의 묘지에는 발해왕을 ‘황상’ 즉 ‘황제’라고 칭하였다.

일본과의 관계를 통해 볼 때에도 발해는 일본에게 스스로를 말갈국이라하지 않고, 부여의 유속이 있는 발해국 내지 고구려의 ‘고려국’으로 자칭하였다. 발해는 또한 당과 전쟁도 치를 만큼 자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732년 발해가 당을 친 것은 발해의 제3대 무왕이 조정에서 결정한일이었다.

발해는 종족으로 보아 예맥, 부여계통의 고구려인이었으며 이들은 기록에서 속말말갈, 백산말갈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중국은 발해가 고구려를계승한 왕조가 아니라, 고구려와 다른 말갈국이 세운 왕조라고 한다. 이는 신당서가 발해 대조영을 ‘고구려에 부속되었으나 속말말갈’이라 하였기때문이다.

이에 반해 발해가 고구려 유민이라고 하는 것은 구당서가 대조영을 ‘고려별종’이라고 한 것에 근거한다. 두 기록은 모두 의미가 있다. 말갈은 당시 동북방 이민족이자 고구려 변방민에 대한 범칭이자 비칭이었기에 구당서는 발해국의 종족계통을 말하고 있는 자료이며, 신당서는 그들의 출신지역을 속말수인 송화강 지역으로 보는 사료로 보아야 한다.

언어학적인 면에서도 발해인들은 고구려어를 사용하였다고 생각된다. 발해어에 대한 자료가 없는 상황이지만, 발해가 고구려와 풍속이 같았다는 구당서 기록을 통해 짐작이 가능하다. 그들은 옮겨 사는 종족이 아니었기에 풍속이 같다는 기록을 언어도 같았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문화적으로도 발해인들은 석실묘와 석곽묘를 사용하던 고구려 지배층의 고분 축조를 하였으며, 고구려인들이 사용하던 온돌을 사용하고 있었다.발해 상경용천부 지역 삼령분의 석실분과 벽화들이 고구려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발해 궁터와 관청터 등에서 고구려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는온돌이 발견되고 있다. 고구려인들이 살던 곳에서 발해인들이 역사를 계승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인류 보편의 토광묘에 관한 그릇된 해석이다. 발해인도 흙구덩이의 토광묘를 많이 사용한 것을 두고 발해인의 토광묘를 마치 고구려와 다른 말갈인의 묘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토광묘는 발해 피지배 서민들의 묘제일 뿐이지, 이를 말갈인의 매장 방법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 서민들의 보편적인 매장 방법이 토광묘이었기에 고구려인과 발해인도 이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 한국인이 고구려ㆍ발해 계승 뚜렷

한국인이 고구려와 발해의 후손이라는 점은 인종학과 문화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세계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왕손을 자처하는 후손들이 한국에만 있다는 것이 그 첫째이다. 즉 횡성(橫城) 고씨(高氏)는 그들의 족보를 근거로 고구려 왕손을 자처하고 있으며, 협계(陜溪) 태씨(太氏)와 영순(永順) 태씨는 발해 왕손을 자처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에 살고 어떤 고씨(高氏)는 스스로 고구려 왕손을 자처하며 그계통을 조선에서 찾고 있는 것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세계에서 아파트에 온돌이 일반화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점도 한국인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후손을 자처할 수 있는 이유이다. 고구려인과 발해인이 사용하던 온돌이 오늘날 국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19세기말부터 남만주 간도지역으로 이주해간 대부분의 조선족이 고구려나 발해 유적이 있는 곳에 정착했다는 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확인된 바로 발해의 유적 옆에는 중국의 조선족이나 러시아의 고려인 부락이 있었다.

발해가 건국된 초기의 수도였던 지린(吉林)성 둔화(敦化) 지역이 발해의 첫 수도였던 구국(舊國)이었고, 허룽(和龍)시의 서고촌에는 중경현덕부인서고성과 정효공주묘가 있으며, 훈춘(琿春) 지방에는 동경용원부로 알려진팔련성터 등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이들 지역은 모두 연변조선족자치주이다.

발해의 가장 오랜 수도였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발해진에도 중국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쌀이 생산되는 향수촌과 강서촌이 있는데 여기에도 대부분 조선족이 살고 있다.

연해주 남단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항구 부근으로 생각되는 크라스키노유적에서는 아직도 그곳의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옮겨가기 전의 논이 그대로 있어 야생벼가 자라고 있다. 발해 솔빈부로 여겨지는 우수리스크 지역에도 고려인이 집단으로 살고 있었다. 19세기말에 이주해 간 이들이 고구려와 발해 유적을 일부러 찾아갔을 리 없다. 삶의 터를 찾다 보니, 고구려와 발해인들이 살던 곳에 머물게되었던 것이다.

<한규철 경성대 교수ㆍ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공동대책위원회 위원장>

(한국일보 200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