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를 되찾자] 간도분쟁 정계비 이전에도 있었다

˝윤관의 동북 9성이 간도분쟁의 출발점이다.˝

1107년(고려 예종 2년)은 발해 멸망 이후 우리 민족의 영토가 다시 두만강 이북 만주까지 확장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해다. 고려 예종은 윤관을 시켜 동북면의 여진을 물리치고 9성을 설치토록 한다.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한 고려가 국시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인 영토확장에 나섰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윤관은 여진 정벌 후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인 선춘령에 고려의 영토 확장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운다. 이 비는 윤관비 또는 선춘령에 세워졌다고 해서 선춘령비라고 불렸다. 

선춘령에 영토확장 기념비 세워

〈고려사〉에 따르면 여진 정벌 이후 고려는 상서 유택을 함주 대도독부사로 삼고 영주-복주-웅주-길주와 공험진에 방어사를 설치하는 등 이 지역을 고유의 행정체계인 주(州)와 진(鎭)으로 편제한다. 이 가운데 특히 공험진은 두만강 이북 지역에 설치된 것으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영토분쟁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이후 이 지역에 추가로 설치된 의주-통태-평융 3성을 합쳐 동북 9성이 성립된다).

하지만 불과 1년 5개월 정도가 지난 1109년 7월, 고려는 9성에서 철수하고 만다. 홍익대 역사교육학과 김구진 교수는 ˝동북 9성 개척 당시 기록을 보면 여진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칭하는 대목이 나온다˝며 ˝고려는 여진족을 적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고려가 다시 9성을 돌려준 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의미를 담은 결정이라는 설명이다.

이때 고려가 여진에게 돌려준 9성은 길주-영주-복주-함주-웅주와

숭녕-통태-진양-선화진으로 최초 설치된 9성과는 다르다. 김 교수는 ˝9성 가운데 가장 북단에 위치한 공험진이 빠져 있고 2년 뒤인 예종 6년에 공험진을 산성으로 수축했다는 기록을 볼 때 고려의 영토는 동북 9성 양보 이후에도 여전히 두만강 이북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두만강 이북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본격화했다. 원나라 멸망 이후 옛 공험진 지역은 여진족 거주지로 대토호였던 태조 이성계의 세력권에 있었고, 조선 건국 이후에도 영향력에는 큰 변화가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 태종 3년인 1403년, 명의 영락제는 왕가인을 만주지역의 여진에 보낸다.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해 여진족을 직접 관할함으로써 이 지역을 편입하겠다는 의도였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아하는 중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태종은 영춘추관사 하륜과 지춘추관사 권근에게 명하여 고려의 〈예종실록〉에서 윤관이 여진을 치고 변경에 (선춘령)비를 세운 것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료에 따라 지도를 작성하는 한편 계품사 김첨을 명나라에 보내 공험진 이남의 여진족은 조선 관할임을 주장하였다. 결국 명은 태종 4년 10월, 공험진 이남 지역을 조선 영토로 인정한다. 이는 고려의 옛 영토를 그대로 이어받겠다는 조선 초기의 영토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건이다.

공험진이 우리 영토의 경계라는 인식은 세종 때에 최고조에 이른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살펴보면 윤관의 동북 9성에 대한 세종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동국지도] 공험진-선춘령

표시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편을 보면 ˝준령이 백두산에서부터 기복하여 남쪽으로 철령까지 뻗어 있어, 1천여 리에 긍한다. 북쪽은 야인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은 철령으로부터, 북쪽은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1천7백여 리다˝라고 서술하여 조선의 동북 경계가 두만강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세종은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공험진의 위치를 확인해 보고하라고 명한다.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지. 만일 길이 막혀 사람을 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면, 폐단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익히 생각하여 아뢰라. (중략) 또 윤관이 여진을 쫓고 9성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이 지금 어느 성이며, 공험진의 어느 쪽에 있는가, 상거는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

이와 같은 세종의 영토의식은 당시에 만들어진 지도에도 충실히 반영되었다. 세종의 명을 받은 정척과 양성지가 세조 9년에 완성한 〈동국지도〉를 보면 두만강 이북에 공험진과 선춘령이 뚜렷하게 표시돼 있다(사진참조). 〈동국지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실측지도다. 따라서 〈동국지도〉 제작자들이 공험진과 선춘령 위치를 직접 확인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일부 일본 학자들의 '동북 9성 함흥평야 위치설'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우리의 역사 서술은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윤관이 개척한 공험진을 목표로 영토를 회복하려 했던 세종과 김종서의 6진 개척은 두만강 이북을 넘지 못하고 멈춰서고 만다. 그리고 고려의 동북 9성과 선춘령비는 잊혀진 역사가 되고 만다.


(뉴스메이커 200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