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학자 1970년대에 고구려사 한국사 규정

고구려사를 둘러싸고 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러시아 학자가 1970년대에 이미 고구려사를 독자적인 한국사로 규정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67.여)가 최근 LG-연암문고(이사장 유영구)에 기증한 자릴가시노바 로자 쇼타예브나 교수(이하 자릴가시노바)의 1979년 저서 「금석학으로 보는 한민족의 발생과 민족사: 광개토왕비를 중심으로」에는 광개토왕비문 분석을 통해 한민족의 기원을 고구려사로 거슬러 추적한 결과가 담겨있다.

「..한민족의 발생과 민족사」는 러시아에서는 드문 광개토왕비 전문가인 자릴가시노바의 대표 저서로, 고구려 연구 뿐 아니라 러시아 한국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명저.

러시아의 오랜 사회주의 체제와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국사학자가 흔치 않은 상황이 겹쳐, 한국 학계에는 그 명성만이 전해졌을 뿐 원저의 실제 내용은 이제야 소개됐다.

책은 광개토왕비를 원문에 충실하게 러시아어로 번역하고 역사.민속.경제사회.신화.언어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그 내용을 분석, 한민족의 독자적인 기원과 발전 과정을 밝히고 있다.

특히 한민족은 남쪽의 베트남과 북쪽 알타이족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발전한 민족이라고 규정한 대목과 비문의 주내용이 신라.백제와의 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중국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속국이 아니었다고 결론짓는 대목 등이 고구려사를 자국사에 편입하려는 중국측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어서 관심을 끈다.

비문에 나온 광개토왕릉을 지키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들에 대한 민속학적 분석을 시도한 부분과 언어학적으로 비문에 등장한 단어에 접근한 점도 흥미롭다.

책의 여러 군데에서는 북한의 광개토왕비 연구자인 박시형의 연구 성과가 인용돼, 저서가 박시형으로부터 크게 영향 받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한편 이교수가 「..한민족의 발생과 민족사」와 함께 기증한 수십권의 책 가운데에는 1904년 핀란드에서 출간된 「일본나라와 수도」도 눈에 띤다.

이 책은 100년 전의 유럽의 소국 핀란드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을 담은 희귀본으로, 기본적으로 일본서이지만 책의 뒷부분에서 우리나라를 중국의 통치를 받다가 1845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독립한 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책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두 열강에 둘러싸인 한국의 처지가 절망적이라고 분석했으며, 산세와 해안선이 험하고, 비교적 추운 농업국가로 우리나라를 묘사해, 지리.기후.풍습 등의 정보는 비교적 정확한 편이었다.

또한 죄인에게 칼을 채우는 풍습, 단층 주택 구조와 온돌, 개고기와 생선을 날로 먹는 식습관 등을 기술했으며 한복을 입은 여성들은 가슴을 내놓고, 어린 남녀 아이들은 서로 벌거벗고 뛰논다고 부정적으로 언급했다.

책을 기증한 이교수는 "자릴가시노바의 책은 러시아사가 전공이다보니 연구 차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이며, 핀란드 책은 그곳 국민의 소개로 발견했다"면서 "자릴가시노바의 책은 광개토왕비의 내용을 민속학.언어학 등 다각적으로 분석한 만큼 여러 학문 분야에 크게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LG-연암문고측은 자릴가시노바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 출간할 예정이다.

(연합뉴스 2004-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