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믿을' 신라초 歷史, 사실로 밝혀

삼국사기 박혁거세 탄생때와 일치
건국연대 BC1세기보다 앞설 수도

“(6촌장의 한 명인)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곁에 있는 숲 사이를 바라보니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가 보니 말은 간 데 없고 큰 알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알을 깨 보니 한 어린아이가 나왔다.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이상했던 까닭에 높이 받들고,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조)

▲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깃든 나정(蘿井)의 우물 흔적으로 추정되는 유적. /문화재청 제공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를 남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전설의 베일 속에서 벗어나 ‘역사적 인물’의 자리로 성큼 걸어오고 있다. 중앙문화재연구원이 사적 245호인 경주 나정을 발굴 조사한 결과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과 일치하는 고고학적 자료들이 발굴된 것이다.< 본보 25일자 A1면 보도 >

발굴단은 이번에 나정에서 발견된 구상 유구(고랑 모양 유적) 내부 맨 아래쪽의 회색 진흙퇴적층을 분석한 결과 이곳의 조성 시기가 기원 전후로 추정되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의 건국 시기인 기원전 57년과 들어맞기 때문이다.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구의 한가운데에서 이 시기의 다른 유적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두형(豆形) 토기 2점이 나온 것도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물론 이번 발굴이 박혁거세의 ‘난생(卵生) 신화’ 자체를 사실로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래의 우물 자리 위에 지어진 ‘8각 건물’이 제사 시설이었음이 분명하다면, 이것이 바로 ‘삼국사기’에 서기 487년(소지마립간 9년) 나을(奈乙·나정)에 세웠다는 신궁(神宮)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8각 건물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제의 ‘구상 유구’는 소지마립간 이전에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어떤 건물’이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건물은 ‘신궁’보다 먼저 이 자리에 있었다는 ‘시조(始祖)의 사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이 사당이 서기 6년(남해차차웅 3년)에 처음 세워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2대 왕인 남해차차웅은 박혁거세의 아들이었고 서기 6년이 시조 사후 2년 후였음을 생각하면 박혁거세가 허구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그러면 왜 이 자리에 사당과 신궁을 세웠을까? 시조인 박혁거세 사후 그 탄생지를 신성시하고 신이(神異)스런 탄생 신화를 유포함으로써 종교적 제의(祭儀)를 통한 지배 권력의 확립을 노린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발굴단의 오재진(吳在鎭) 책임연구원은 “씨족묘에서의 제사를 통해 권력과 민생의 안정을 도모한 것은 당시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고 말했다.

이번 발굴은 또 그동안 학계에서 ‘믿기 어려운 기록’으로 여겨지던 서기 3세기 이전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이와 관련, 이종욱(李鍾旭)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백제 초기의 유적인 서울 풍납토성의 연대가 기원전 2세기까지 올라가는 것을 보면 삼국의 건국 연대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기원전 1세기보다 오히려 한 세기 정도 더 앞당겨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 유석재 기자 2004-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