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다큐 운명의20년] 위안스카이 ‘골수까지 병든 조선’ 의 최고 권력자로

개화파와 수구파가 서로 자신의 이해에 맞춰
나라를 주무르려다 빈사에 빠진 조선…

위안스카이, 스스로 中황제에

▲ 젊은 날의 위안스카이. 청나라 대표로 조선에 부임해서 10년 가까이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위안스카이(袁世凱:1859~ 1916)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의 군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과거에 응시했지만 실패한 후 우장칭(吳長慶)이 이끄는 군대에 들어갔다.

1882년 조선의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우의 군대가 파견되자 그 막료로 따라왔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천진조약(天津條約)에 따라 청과 일본 군대가 철수하면서 1885년 여름 중국으로 돌아갔지만 5개월 만에 조선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쥐고 다시 돌아왔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패배한 후 조선을 떠난 그는 수도 베이징이 있는 직예성(直隸省) 안찰사로 천진 부근에서 서양식 군대를 훈련시켰다. 1901년 청의 실권자였던 이홍장(李鴻章)이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직예총독(直隸總督)이 되어 정치적 위상을 강화했다.

청 왕실과 귀족의 견제로 1908년 정계를 물러났지만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청과 혁명군 양쪽의 동의 하에 내각 총리대신이 됐다. 이어 청이 무너진 후 혁명군의 임시 대총통 쑨원(孫文)을 밀어내고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초대 대총통에 취임했다.

1916년 1월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지만 안팎의 압력에 의해 3개월 만에 황제 제도 취소를 선언했고, 계속되는 반원(反袁)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었다.

淸商들이 그 ‘잃어버린 10년’ 동안 조선팔도를 누비며 조선의 풀뿌리까지 마지막 고혈을 빨고 있었다


1885년 8월, 제물포 항구로 청나라 군함 비호(飛虎)와 진해함(鎭海艦) 두척이 들어오고 있다. 바다 위로 내리비치는 해는 뜨겁고 강렬하지만, 진해함 선창에 선 위안스카이의 위세는 그를 압도할 만큼 거칠다.

갑신정변이 불러온 역풍(逆風)이었다. 정변을 뒤엎고 개화파와 일본을 하루아침에 패자(敗者)로 만들었던 스물여섯살의 실력자.

정변 진압 후 청나라로 돌아갔던 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 때 중국으로 잡혀가 3년 동안 천진 보정부(保定府)에 억류돼 있던 대원군을 호송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그에겐 ‘주차조선총리교섭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란 전무후무한 직책이 기다리고 있다. 이 기나긴 관직명의 실체는 ‘조선에 관한 모든 권력’이다.

그는 조선의 군주를 배알하는 자리에서도 기립하지 않을 것이며, 고종을 ‘혼군(昏君)’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하고 나선다. 조선 정부관료 스무명을 일거에 자신의 측근으로 갈아치웠다. 미국공사 포크는 이를 ‘무혈 정변’이라고 이름했다.

조선의 고위 관리와 서울 주재 외교관들은 그를 ‘원대인(元大人)’ ‘감국대신(監國大臣)’이라 부른다.

위안스카이는 갑신정변 후 10년 간 ‘왕좌 배후의 권력 (the power behind the throne)’으로 군림한다. 자신의 명의로 ‘공명호조’(空名護照)란 신분증을 발행, 청상(淸商)들이 조선 팔도를 누비며 조선의 풀뿌리 경제까지 들어먹게 만들고, 군함까지 내주며 인삼 밀수를 부추긴다.

개화파와 수구파가 서로 자신의 정파적 이해에 맞춰 나라를 주무르려다 빈사에 빠진 조선은 그 ‘잃어버린 10년’ 동안 속속들이 마지막 고혈을 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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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를 태운 진해함은 밀물을 타고 상륙한다. 조선은 그 밀물 저편에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갑신정변 후 조선 정부는 외세의 ‘균세(均勢)’를 이루기 위해 러시아에 접근하고 있었다. 조선반도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날 경우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해주기를 희망했던 이 은밀한 움직임. 힘없는 나라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자구책이며 동시에 반청 정책이기도 했다.

조선의 이 외교적인 노력은 청나라 뿐만이 아니라 조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열강들을 긴장시켰다. 85년 3월,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하고는 멋대로 포트 해밀튼(Port Hamilton)이라고 이름지었다.

독일은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조선의 중립화를 제안했고, 일본은 최대의 적국인 청국에 보다 강한 관리를 조선에 보내라고 건의했다. 러시아를 막기 위해 그보다 약한 청을 이용했던 일본은 결국 20년 후 조선 땅에서 노(老) 제국 러시아와 한판 승부를 벌인다.

淸軍지휘관 서울 입성 갑신정변 실패 후 조선에 급파된 청나라 군대의 지휘관 오대징(吳大徵)이 서울에 들어와 수표교를 지나고 있다.

조선의 러시아 접근에 가장 분개했던 것은 청이었다. 조선을 무대로 야심을 키워가던 위안스카이였다. “러시아가 조선의 나약함을 이용하여 속이고 있으니, 조선을 보호할 수 있는 나라란 오직 ‘상국(上國)’뿐이다.

조선은 못 쓰게 된 배와 같고, 병이 골수에 들었으니 위안스카이는 배만드는 장인의 임무로 조선을 위해 탄식하며, 훌륭한 의사로서 반드시 좋은 약을 보내줄 것이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 글은, 이른바 ‘조러밀약사건’ 이후, 위안스카이가 고종에게 보낸 ‘적간론(摘奸論)’과 ‘유언사조(諭言四條)’의 내용이다.

안하무인, 기세등등한 위안스카이의 위세를 등에 업은 청나라 상인들의 거친 행동은 조선 사회를 완전히 흔들어놓았다. 1886년, 청나라 상인들의 인천 해관 습격 사건이 좋은 예다. 청상이 조선 홍삼을 밀수출하려는 것을 해관에서 적발했으나, 이들은 검사를 거부하고 도리어 해관을 습격했다.

위안스카이의 세력을 등에 업은 청상의 만행은 1884년에는 청상회관(淸商會館) 건설 부지의 매도를 거부한 땅주인 이범진(李範晉)을 폭행한 사건부터, 외상값을 요구한 광통교 약국 주인의 아들을 살해한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을 보도한 한성순보를 습격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 행패가 거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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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1월, 서울의 총리아문 앞에서는 수백명이 상인들이 멍석을 깔고 앉아 연좌시위를 벌였다. 도성 안의 모든 점포는 그날 문을 닫았다. 생존의 위협이 빚어낸 ‘근대적 파업시위’였다. 청상들은 외국상인들의 진입이 허용되지 않은 도심으로까지 침입해 조선의 전통적 상거래를 몰살시켰다.

조선의 텅빈 국고는 청나라의 차관으로만, 그것도 간신히 채워졌다. 재정적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선 정부는 독일 미국 프랑스에 대해 차관 교섭을 나섰지만, 위안스카이의 방해로 모두 실패했다. 청나라가 제공하는 차관은, 빚을 갚는 또하나의 빚, 말하자면 돌려막기에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그 대가로 조선의 이권을 가져갔으며, 조선의 자주권을 수중에 넣었다.

청은 재정적으로 조선을 꽁꽁 묶어두면서 외교권까지 침탈해들어갔다. 1887년 11월, 미 해군함정 오하마(Omaha)호는 조선의 주미전권대신 박정양을 태우고 인천항을 출발했다.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알리러 나선 길이었다.

3개월 전, 남대문 밖까지 나섰던 박정양은 위안스카이에게 뒷덜미를 붙잡혀 되돌아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정부의 항의로 결국 위안스카이가 한발 물러섰지만, 이 한발 양보에는 참담하고 굴욕적인 조건이 붙었다.

조선공사는 주재국에 가면 먼저 청국공사관에 알려야할 뿐만이 아니라, 모든 외교모임에서는 반드시 청국공사의 아랫자리에 앉아야만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식으로 위안스카이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5개국에 조선 외교관을 파견하는 계획을 방해하고 좌절시켰다.

힘없고 가난한 나라의 하늘 위에 축하의 메시지 같은 건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침내 스스로 쏘아올릴 축포뿐이다. 너무 빠르지 않게, 성급하지도 않게. 그러나 무엇보다도 축포의 방향을 미래로 조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김인숙은…

연세대 신문방송학과에 재학 중인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상실의 계절’이 당선돼 등단했다. ‘유리구두’ ‘칼날과 사랑’ 같은 12권의 소설책을 냈다. 한국문학상,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작년에 ‘올해의 문장상(소설부문)’을 받았다.

(조선일보 2004-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