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속의 만주]11. 중국과 한국의 경계인, 조선족

소자(少子)고령화시대가 열리고 있다. 현재 한국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도 인구 감소를 겪고 있다. 중국 56개 민족 가운데 인구 감소가 가장 심한 민족은 다름 아닌 조선족이다. 어떤 조선족은 “조선족은 중국의 모범적인 소수 민족으로 일제시기에는 항일투쟁에 앞장섰고, 최근에는 국가의 저출산정책에도 앞장서더니 이제는 아이를 더 나으라고 해도 안낳는다”고 말한다. 소수 민족은 2명까지도 나을 수가 있으나 조선족 기혼 여성들은 대체로 한 자녀를 선호하고 있다. 여성의 자아를 찾고 자녀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키려면 한 자녀가 적당하다는 주장이다.

만주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족은 1870년대 7만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일제 강점기에 급증, 1953년에는 1백10만여명에 달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조선족은 꾸준히 늘었으나 90년대 들어 증가세가 완화되더니 2000년대 들어 인구성장률이 멈춰버렸다. 이 때문에 베이징 중앙민족학원 황유복 교수 같은 학자들은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앞으로 20~50년 안에 조선족 인구가 1백만명 이내로 줄어들지도 모른다”며 ‘조선족 위기론’을 거론할 정도다.

중국에서도 만주로 불리는 동북 3성, 즉 지린성과 헤이룽장성, 랴오닝성은 조선족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중국내 조선족의 98%가 거주하였다. 그 가운데 지린성에 3분의 2가 몰려 있고 또한 옌볜조선족자치주에는 조선족 전체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43%가 살았다.

그러나 2000년 들어 동북 3성의 조선족은 전체 중국내 조선족의 92%로 줄어들었다. 만주지역의 많은 조선족들이 중국의 베이징이나 상하이, 톈진, 광저우, 칭다오 등과 같은 대도시나 공업지대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고향방문이나 산업연수생, 국제결혼과 같은 길을 통해 한국을 찾는 조선족도 크게 늘기 시작했다. 2002년 12월말 현재 한국을 찾은 조선족은 10만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들 조선족에게 조국은 무엇일까? 몇해전 여름, 압록강 서쪽 끝에서 두만강 동쪽 끝까지 3,000리를 여행했을 당시 안내 강사로 동행했던 조선족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조국은 중국, 모국은 한반도”라고 말했다. 또 “자식에게는 ‘고향을 떠나온 아비가 죽어서 머리가 고향하늘을 향하도록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애절한 사연을 전해주었다.

그후 어느 조선족으로부터 “한반도는 친정이고 중국은 시집”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즉 조선족이 중국에서 살아가는 것을 시집온 며느리의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소경 3년의 고단한 시집살이로 비유한 얘기였다.

조선족들이 언어, 문화, 풍습, 역사가 다른 중국 민족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데에는 어려움이 실로 컸다. 특히 1960, 70년대 중국 전역을 휩쓴 문화대혁명 시기, 소수민족으로서 조선족들이 겪었던 설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남한이 고향인 사람들은 ‘조선특무’로 몰릴까봐 노심초사했고, 조선식 풍습을 그대로 따랐다가는 ‘반혁명’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당시에는 북한·중국 관계마저 좋지 않아 조선족으로서는 비빌 언덕이 없었다. 조선족 청년들 가운데에는 공부도 중단한 채, 어느 소수 민족보다도 앞장서서 농촌으로 변방으로 자원하여 ‘하방’(下放)의 길을 떠났다.

1978년 장칭(江靑),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의 ‘4인방’의 몰락 이후, 개혁·개방을 맞았으나 문화혁명기에 받은 조선족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88서울올림픽은 조선족에게 일대 사건으로 다가갔다. 서울올림픽이 공중파를 타고 텔레비전 화면에 비쳤을 때 함께 전해진 한국의 발전상은 희망 그 자체였다. 많은 조선족들은 한국의 모든 경기를 응원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경기에서도 한국을 응원할 만큼 한국 열풍, ‘코리안 드림’은 조선족 사회를 휩쓸었다.

그뒤 90년대 초·중반, 서울시내 지하도 곳곳에서는 중국약재 보따리를 끼고 있는 조선족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도 코리안 드림을 품고 고향방문길에 올랐다. 수십년 만에 고향을 방문한 조선족들은 약재를 팔고 풍찬노숙을 하며 번 돈으로 한국제 의류, 화장품, 가재도구들을 사가지고 중국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중국의 가족들에게 안겨준 몇천원 안되는 작은 선물 하나하나는 조선족 3, 4세들에게 번영의 약속이었다.

조선족의 한국 방문 첫 행렬이 중국약재를 가져온 고향방문단이었다면, 이후의 행렬은 ‘산업연수생’과 농촌 총각에게 시집온 ‘조선족처녀’들로 채워졌다. 이 과정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산업재해를 입은 조선족들의 이야기가 뉴스로 보도됐다. 한국인에게 각종의 사기를 당한 조선족들의 딱한 사연도 잇따라 전해졌다.

그런가 하면 중국 조선족 사회에는 한국 기업가들이 진출하면서 술집, 노래방 등의 퇴폐 업소들이 들어섰고 배금주의, 일확천금주의가 판을 치면서 농사를 작파한 조선족 농민들이 늘어만 갔다.

최근 만난 옌볜의 한 여성작가 겸 사회운동가는 “한국이 우리의 혼동된 정체성을 찾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일갈했다. 일제시기 나라 잃은 백성으로 남의 집 살림을 했고, 문화혁명시기 끌려다니면서 다시 나라를 잃었고, 뒤늦게 찾은 나라에서는 동포에게 뺨을 맞고 나서야 나라를 찾았다는 역설적인 설명이었다. ‘조선족이라는 소수 민족으로서의 중국공민’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조선족은 경계에 서있다. 나라와 나라의 경계, 역사와 역사의 경계, 문화와 문화의 경계에 서있다. 그들은 중국의 동화정책이나 고구려사의 중국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한·중의 경계 위에서 혹은 경계를 넘나들면서 21세 변화된 국내외 환경에서 새로운 적응을 준비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김귀옥/성공회대 연구교수·사회학>

(경향신문 2004-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