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은 고구려 도둑질...감정대응 금물"

(최근 중국이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작업을 추진해와 한중간에 '역사전쟁'으로 비화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이에 민찬 '한국사' 저자로 유명한 역사학자 이이화씨가 이 문제에 대한 글을 보내와 소개한다....편집자 주)

근래 중국에서 고구려를 자기네 지방정권이라는 주장하면서 고구려사를 자기들 역사에 편입하려하고 있다. 이에 한국인들이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조금 지나서는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민족감정과 결부되어 현재 한국인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열띤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는 비단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시민들과 학생들의 관심도 높아가고 있으며 뒤늦게 정부 당국도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동북공정'의 실상을 현재적 관점에서 알아보기로 한다.

1) 동북공정(東北工程) 이전의 고구려사 인식태도

중국은 오랫동안 고구려사를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한국사로 보았다. 그러던 중국 역사학자들이 1994년부터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정권이었으므로 당연히 중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고구려 민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므로 소수민족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도 주장하였다.

2000년부터는 고구려사 연구자를 양성하는 사업을 벌여 100여명의 학자가 자료수입 또는 유적 발굴에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고구려의 역사를 국내성을 수도로 정한 시기는 중국사, 평양 천도 이후는 한국사에 포함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2001년 북한이 유네스코에, 평양일대에 보존된 고구려 고분변화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달라고 신청하였다. 이 때 중국은 심사국의 자격으로 북한의 유적을 돌아보고 관리 소홀과 접근의 어려움을 들어 등재를 보류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어 자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보수 발굴하면서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를 신청하였다.

2) 동북공정의 주요 내용

2002년 2월부터 동북지역의 역사와 현황에 관한 학술작업인 동북공정을 대형 국책사업으로 지정해 고구려 편입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3조여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동북공정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동북지방은 현재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이른바 '동북3성'을 일컫는 지역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영역에 해당한다. 물론 국내성이 있던 집안과 백두산도 이 지역에 들어있다.

동북공정은 기본목적을 고구려와 발해에 관련된 자료의 수집, 유물 유적의 발굴 보존에 두었다. 이 프로젝트에 따라 먼저 집안현의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등의 정비사업을 벌였다. 주변에 널려있는 수천 채의 민가를 헐어내고 내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또 요양지방과 심양지방의 고구려 성곽을 수리하고 동경성 등 발해유적에도 비슷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켰다. 그 근거는 크게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朱蒙)이 중국의 고대역사에 등장하는 고이족과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는 것, 둘째로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朝貢)하였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의 속국이라는 것, 셋째 고구려가 벌인 수당과의 전쟁이 국가와의 전쟁이 아니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벌인 통일전쟁이라는 것, 넷째 고구려가 멸망한 뒤 그 유민들이 거의 당 나라로 끌려가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혈연적 계승이 단절되었다는 것, 다섯째 고구려의 왕족은 고씨, 고려의 왕족은 왕씨여서 계승성이 단절되었다는 근거를 제시하였다.

3) 동북공정 추진의 배경

1992년에는 한중수교가 이루어져 많은 한국인들이 만주일대로 몰려가 고구려와 발해유적을 찾아갔다. 한국인들은 단순한 관광이나 유적 답사의 차원을 넘어서는 행태를 보였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이러하다.

승용차에 “고구려는 우리 땅” 또는 “백두산은 우리 땅” 따위의 프랑 카드를 걸고 돌아다녔다. 또 많은 제물과 제수를 한국에서 꾸려가서 울긋불긋한 제복을 입고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며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고 제주를 천지에 뿌리기도 하였다.

또 백두산 정상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 삼창을 소리 높여 외치기도 하였다. 연변 일대를 돌아다니면서도 거리나 술집에서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면서 통일이 되면 우리가 찾아야 한다고 떠들었다. 연변일대에 1백만명이 넘게 거주하는 조선족이 한국과 연대하여 앞으로 독립을 요구할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있었다.

한편 앞으로 한국이 통일되면 중국은 북한지역에 대해 고구려 땅의 영유권을 주장할 명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대동강을 경계선으로 삼자는 우길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통일에 즈음하여 북한의 주민들이 대량으로 국경을 넘어 연변일대로 이주하여 민족적 갈등을 유발하고 독립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구려 발해의 영토와 간도의 영유권을 확실하게 하여 이런 요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고구려 정권의 특징과 후기의 역사인식

고구려의 국가체제가 중앙집권제적 군현제를 골간으로 한 중국의 역대정권과 다른 특징을 들어본다.

첫째 정치제도에서 나타난다. 고구려는 고대국가를 형성하면서 독자적 정치체제를 갖추었으며 황제국을 표방하였다. 그 특징은 국가형성의 초기에 독자적인 관직명에 잘 드러난다.

관직명에서 태대형(太大兄) 등에서 나타나는 형(兄)은 족장세력을 편제하는 관직이었으며 태대사자(太大使者) 등에서 나타나는 사자(使者)는 왕권을 수행하는 관직이었다. 중국에는 없는 관직명이었다.

둘째는 고구려는 다종족 국가로 북방문화를 수용하였다는 데 또 다른 특징이 드러난다. 곧 부여를 중심으로 옥저 동예 숙신 선비 등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여러 종족집단을 통합한 최초의 통일국가였다는 점이다.

후기에 와서 중국문화와 정치체제를 수용하면서도 북방 유목민족의 문화와 생활풍습을 토대로 유지 발전하였던 것이다. 또 700여년 동안 국가를 유지하고 그 3분의 2의 기간을 대동강 가의 평양에서 수도를 정하였다.

고려는 분명하게 국명에서 나타나듯,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표방하여 고토 회복전을 폈다. 이런 기본 인식에서 김부식이 <삼국사기>의 편찬하면서 고구려사를 본기에 편집해 한국사로 규정하였으며 일연도 <삼국유사>를 쓰면서 고구려를 신라 백제와 같은 민족국가로 단정하였다.

이규보는 <동명왕편>을 지어 고구려의 건국과 그 시조를 찬양하였다고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쓰면서 발해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이며 그 계통이 고려로 이어졌다는 역사인식을 보여주었다.

조선시대 고구려 인식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건국 초기부터 세종은 평양에 고구려 시조를 모시는 묘사(廟祠)를 새로 짓게 하고 몸소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 그 뒤에도 이런 관례는 변함이 없었다.

5) 고구려를 중국사로 주장하는 논리의 허구

위에서 지적한 대로 중국측 주장의 다섯 가지 논리의 허구를 지적해보자. 첫째 고이족 고양씨의 후예문제이다. 고이족은 산동지방에 살았던 부족이었으나 고구려 영토로 이동했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

고양씨(전욱의 호)는 중국 고대사(서기전 2천 5백년)에 제왕으로 등장하는 전설의 인물이다. 중국의 역사학자들도 그 인물의 실체를 인정치 않는다. 고구려 왕실이 고씨 성을 가졌다할지라도 고양씨의 시대와는 2천여년(고구려 건국은 서기전 37년)의 간격이 난다.

둘째, 중국에 조공하였다는 근거도 논리가 옳지 않는다. 중국 제국은 명분을 중시하여 스스로를 천자국이라 표방하고 주변국가에 조공을 하게 하였다. 이를 거절하면 정벌을 단행하였다. 따라서 조공은 명분을 주는 외교 형식이었다.

셋째, 수당과의 전쟁을 통일전쟁으로 보는 주장은 더욱 논리에 어긋난다. 고구려는 요동일대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장성을 쌓고 대항하였다. 엄연히 지방정부 차원이 아닌 독립국가로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7백여년을 지탱하였다.

넷째, 고구려 유민들이 거의 당 나라로 끌려가 혈연적 계승이 단절되었다는 주장도 언어도단이다. 그야말로 대다수 유민들은 그 영토 안에 살면서 안동도호부에 저항하였고 뒤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다섯째, 고구려와 고려와는 계승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계승성의 근거를 성이 같은 왕조로 친다면 중국의 역사정권은 하나도 동일한 성을 가진 적이 없다.

고려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250여년이 지났으나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표방하였고 동명왕릉을 시조능으로 받들고 보존하였으며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여 제2수도로 삼았다. 또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왕족을 받아들이고 발해 역대왕의 왕묘를 세우게 하고 받들었다.

역대 중국의 정권은 주변국가를 끊임없이 복속국으로 만들려 하였다. 이런 의식의 바탕에서 중국의 정사인 <삼국지>에 고구려를 동이전에 포함시켰다.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정사 부분인 본기(本紀)에 넣지 않고 외전(外傳)에 넣었던 것이다. 이런 기술방식은 <수서> <당서>로 그대로 이어졌다.

또 중국사람들은 고려를 고구려의 후예라고 보았으며 명 나라는 처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이 고구려의 옛땅을 찾기 위해 일본을 끌어들였다고 의심하였다.

그들은 근현대 시기에도 조선사람을 고구려 후예로 보았다. 그들은 우리의 독립투사들을 보고 “망꿔노”(亡國奴)라는 말과 함께 “꺼우리 팡스”(高句麗幇)라고 욕질을 하였던 것이다.

6) 현재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고구려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편입하려는 것은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수준이 아니라 고구려를 도둑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고구려의 유적을 인류 공유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보아 보존 관리한다면 보편사적 관점에서 나무랄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대응논리는 이런 관점에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세 가지 정도 당면과제가 놓여있다.

첫째, 철저한 고구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고구려 정신과 기상을 구체적으로 접근하여 국민 차원의 선양사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현재적 관점에서 고구려사가 우리의 역사임을 밝히고 그 왜곡문제에 접근해 한다. 그러나 옛 영토를 회복하자는 운동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오마이뉴스 2004-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