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미스터리](36)경기 연천 호로고루일대

“낚시터 바위 위에 비치는 깊은 밤 고운 달빛(釣臺暮月), 자지포 여울에서 고기잡는 어선의 등불(芝灘漁火), 자미성(호로고루) 위로 떠오르는 초승달(嵋城初月)….”

경기 연천 고랑포를 중심으로 한 임진강 절경을 흔히 고호팔경(皐湖八景)이라 한다. 현무암 대지가 오랜 강물의 침식작용으로 깎아지른 수직절벽(垂直絶壁)으로 변해 병풍처럼 펼쳐진 천혜의 절경.

이 서정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잠시 잊어버리자. 1,500년 전 고구려·백제·신라의 국경지역이었고, 이제는 남북이 으르렁대며 싸웠던 6·25전쟁의 격전지였음을 떠올리자.

◇1,500년 전 국경, 지금은 분단의 상징이 되어=돌이켜보면 3국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7세기까지 고구려-신라는 16차례, 고구려-백제는 31차례(혹은 33차례), 백제-신라는 29차례에 걸쳐 피말리는 전투를 벌였다.

한성백제의 영역이었던 임진강 유역은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년)·장수왕(재위 413~491년)대부터 고구려 영역으로 바뀐다. 고구려는 남하루트에 호로고루(瓠蘆古壘)를 비롯해 당포성, 은대리성 등 크고 작은 성과 보루를 축조하기 시작한다.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치던 662년(문무왕 11년)의 삼국사기 기록.

“굶주림과 추위에 떨어 죽은 병사들이 헤아릴 수 없었다. 행렬이 호로하(瓠瀘河·호로고루)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 군사가 쫓아와서 강 언덕에 나란히 진을 쳤다. 신라 군사들은 적(고구려군)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접전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백제·고구려를 제압한 통일신라는 당나라와 맞선다.

“673년, 당군이 북쪽 변경을 침범했는데 아홉 번 싸워 이겨 2,000여명을 목베었고, 호로(瓠瀘·호로고루)강에 빠져 죽은 당나라 군사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호로고루는 이렇게 삼국의 국경하천이었으며, 훗날에는 신라와 당나라가 양보할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왜 하필 호로고루냐. 무릎 정도밖에 차지 않은 이곳은 임진강 하류에서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널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이다.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 전차부대도 개성에서 문산쪽으로 직진하지 않고 20㎞나 우회, 호로고루 여울목을 도하했다.

◇고구려군의 군량미 창고=전쟁 이후에도 호로고루 일대는 오랫동안 민간인 통제선 북쪽 군사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이 지역이 군사보호구역에서 해제됐다. 호로고루도 훼손되기 시작했다. 도로가 생기고 축사가 마련됐으며 버섯재배를 위해 포클레인이 동원되었다. 토지박물관 심광주 학예실장의 말.

“인민군이 6·25때 정상에 쌓은 포대(砲臺)와 길다란 참호 때문에 일부 무너졌어요. 성벽도 10여년 전 마을 주민들이 뱀을 잡기 위해 중장비를 동원해서 무너뜨렸다는 겁니다.”

이 와중에서 다량의 고구려 기와편들이 쏟아졌다. 토지박물관이 98년부터 정밀지표조사에 나섰다. 뱀은 조사 내내 조사단을 괴롭혔다. 돌로 쌓은 산성에는 원래 온갖 뱀들이 우글거리게 마련이다. 돌 틈바구니는 뱀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다.

“제가 본 뱀의 종류만 해도 한 50종류는 됐어요. 맹독성 뱀들도 눈에 띄었는데 조사 도중에 한 20여마리는 잡았습니다.”

그러던 98년 8월17일. 호로고루에서 동쪽으로 20㎞쯤 떨어진 무등리 2보루에 오른 조사단은 아주 획기적인 발견을 하게 된다. 임진강에 접한 깎아지른 단애의 단면토층에서 엄청난 양의 탄화곡물을 발견한 것이다.

“어마어마했어요. 가마니로 치면 수백가마니 될까. 탄화곡물과 함께 발견된 고구려 토기편이나 소토덩어리 등으로 미루어 이곳은 고구려 군량미 창고임이 분명했어요.” 그랬다. 고구려의 군량미 창고였던 것이다.

발굴단은 허문회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탄화미 분석을 의뢰하는 한편 국립문화재연구소 등 3곳에 탄소연대측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고구려 군사들은 쌀과 조를 섞어 먹었으며 쌀의 품종은 자포니카(Japonica)임을 입증했다.

또 쌀도 현미와 잘 도정된 백미를 적절히 섞어 먹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현미는 벼껍질만 벗긴 것이고 백미는 한번 더 잘 다듬은 쌀이다. 현미는 소화에 문제가 있고, 백미는 영양분이 파괴되며 보관상 문제를 안고 있다.

연대측정 결과도 흥미로웠다. AD 440~690년 사이, 즉 모두 5세기~7세기 중후반이라는 것. 고구려가 이곳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와 겹치고 있다. 또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고구려가 당시로서는 고급 곡물인 쌀을 최전방 군사들에게까지 먹였을 정도로 부강했다는 점.

“당시에도 한반도 북쪽에는 논보다는 밭이 많았을 것이고 조밥을 많이 먹었을 겁니다. 그런데 고구려 군사들까지 조와, 당시로서는 고급 곡물인 쌀을 섞어 먹었다는 건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쌀을 대량으로 수확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허교수는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고구려 대제국의 땅인 요동반도 요하유역에는 대평야가 있었을 겁니다. 그 곡창지대에서 쌀을 대량으로 수확하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무등리에서 발견된 군량미 창고는 만주와 요동반도를 석권한 고구려 대제국의 욱일승천한 국력을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얘기다. 토지박물관이 호로고루에 대한 조사를 계속 벌인 끝에 중요한 성과가 이어졌다.

◇호로고루엔 언제나 평화가 깃들까=우선 임진강·한강 유역의 40개 고구려 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고구려 기와가 발견됐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독특한 성벽의 축조기법이다. 바닥을 점토로 쌓아 올리고 중간부분에는 사질토로 판축을 한 뒤 그 양쪽을 거의 대칭으로 돌성을 쌓았다는 점.

“삼국시대 축성기법은 일반적으로 흙성(土城), 혹은 돌성(石城), 아니면 내부에 돌로써 쌓아올리고 외부에 흙을 덮어 쌓은 석심토축성(石心土築城)인데…. 호로고루는 석·토성의 장점을 적절히 결합하여 축성이 용이하면서도 견고하게 쌓은 것입니다.”

성벽 동벽의 높이는 6~10m였다. 북쪽 말단부는 임진강의 단애면부에 연결되어 무려 30m의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임진강을 통해 적의 접근을 불허한 요새였다는 얘기다. 전체 성벽의 둘레는 길이 401m에 달했다.

호로고루는 지금도 전쟁의 기운을 머금은 채 1,500년의 고단한 몸을 지탱하고 있다. 숨막힐 듯한 긴장감과 적막감은 여전하고…. 1㎞만 올라가도 온통 지뢰밭이고, 8㎞ 올라가면 북한군이 파놓은 고랑포 땅굴(1호 땅굴)이 있다. 호로고루엔 언제나 평화가 깃들 것인가.

〈조유전/고고학자〉

(경향신문 200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