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민족주의’

이웃국가들끼리 잘 지내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말도 있지만 한국과 일본간에는 크고 작은 갈등들이 끊일 새가 없다. 요즘은 한·일간의 독도우표 발행문제가 양국민의 자존심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이 연초 독도우표를 발행하자 일본은 만국우편연합을 통해 비난성명을 190개 회원국에 보냈고, 며칠전에는 일본 우정공사가 우표수집업자의 주문을 받아 ‘다케시마’ 우표 360장을 발행했다는 소식이다. 그런가 하면 일본 자민당 내 보수계 의원들이 독도를 비롯해 러시아와 영토분쟁중인 북방 4개섬(쿠릴열도), 중국과 분쟁중인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등 3개 도서의 사진이 들어간 우표 발행을 신청했다고 한다. 이런 일본의 움직임에 한국민들이 분개하는 것은 당연하다.

3·1절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겨냥해 모처럼 쓴소리를 해 관심을 모았다. 일각선 이것이 ‘총선용’ 인기발언이란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좀더 후련하게 직격탄을 날렸더라면 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독도문제, 야스쿠니 참배,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중·일간의 역사 공방이 뜨겁다. 이 역사 공방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민족주의의 열기도 더욱 고조되고 있는 것 같다.

-韓·中·日 역사공방 열기-

이런 분위기는 9·11테러 이후 급변한 국제정세와 무관하지 않다. 일본의 사카이 나오키 교수(미국 코넬대 아시아연구과)는 “9·11 이후 미국에서 터져나온 강렬한 민족주의가 20년 이상 계속돼온 오리엔탈리즘·서양중심주의 비판, 소수자·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비판 등을 한순간에 원상복구시켰다”면서 테러사건을 계기로 미국 내셔널리즘이 전면 부상했다고 진단했다.

현재의 강력한 민족주의 바람은 과연 무엇를 의미하는가. 민족주의는 한 국가사회의 에너지를 결집시켜주는 긍정적 측면이 있으나 과잉 민족주의의 폐해 또한 경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임지현 한양대 교수(사학과)는 작년 사카이 교수와의 대담을 모아 낸 책 ‘오만과 편견’에서 한·일 양국의 민족주의가 서로를 배제하면서도 서로를 강화하는 ‘적대적 공범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세계의 헤게모니를 틀어쥐고 있는 틈바구니에서 일본은 군사대국화의 야망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이런 형태로 나타난 일본의 민족주의는 한반도(남북한)의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며 그것은 다시 일본의 민족주의를 강화한다. 적대적 공범관계란 이런 것을 말한다.

두 대담자는 각각 한국인으로서의 ‘세습적 희생자 의식’과 일본인으로서의 ‘식민주의적 죄의식’의 극복을 모색하고 있다. 그 목적은 ‘경계짓기로서의 근대(민족국가)를 넘어서기’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근대적 정체성이 민족·인종·국가·성·계급에 따른 경계짓기를 통해 형성됐으며, 거기에는 차별과 배제가 전제로 깔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차별·배제부르는 선긋기-

한·일 지식인들이 펼치는 이런 민족주의 극복 논의가 양국에서 다수로부터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에는 동북아의 정치지형이 너무나 냉혹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매우 한가한 탁상공론처럼 비칠 수도 있다. 임교수 자신도 ‘세습적 희생자’라는 자기규정에 대한 비판이 일본의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오해될 가능성을 우려한다. ‘신성한’ 국사와 민족의 해체 논의는 급진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민족을 다양한 층위에서 바라보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은 가치있는 일이다. 일본의 정치적 우경화나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는 물론 철저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국가, 민족, 인종을 넘어선 동시대인으로서 적대적 공범관계의 해체와 연대를 모색하는 민간차원의 작업도 계속되어야 한다.

〈김철웅/미디어부장〉

(경향신문 200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