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통일 동아시아사 차원 검토 학술대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을 고대 동아시아사의 맥락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학술대회가 개최된다.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소장 최효식)는 12일 한국언론재단 19층에서 '7세기 동아시아 국제 정세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을 주제로 제24회 신라문화학술회의를 개최한다.

이기동 동국대 교수는 미리 배포한 기조강연문에서 "고구려가 아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군사적 우위 때문이 아니라 외교적 영민함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교수는 "7세기 동아시아 세계에서 삼국이 전개한 외교 공작과 전쟁의 진상에 대한 이해는 우리 역사학계에 부과된 중대한 연구과제"라며 이에 대한 설명이 이뤄질 때에만 "군사대국 고구려에 의한 '큰 규모'의 통일이 좌절되고 신라에 의한 '작은 규모'의 삼국 통일이 달성됐던 원인 구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교수에 따르면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당이 한창 중천에 높이 뜬 태양인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 660년대의 격류에서 잠시 발을 뺄 적절한 계기를 포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으로 이는 "신라는 당제국의 힘을 이용해 고구려와 백제 양굴의 장기간에 걸친 군사적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과는 상반된다.

그는 "고구려가 보다 유연한 자세를 취해 무후(武后) 집권 초기의 신경질적인 침략 야욕을 조금만이라도 완화시켰더라면 머지않아 대외 위기가 사라져 오랫동안 안녕을 구가했을 터"라며 신라의 동아시아세계의 흐름에 순응한 외교가 삼국통일의 밑거름이었음을 강조했다.

연민수 부산대 교수는 그간 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삼국 통일 시기 일본의 삼국에 대한 외교 정책을 검토했다.

그는 "7세기 왜국의 대(對)한반도 외교정책은 선진문물의 수입이라는 국가적 과제에 있었다"며 "이를 위해 7세기 이전의 백제 일국주의에서 벗어나 다국외교로 전환했고 대립과 갈등관계였던 신라와도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연교수는 "외교노선을 둘러싸고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던 왜왕권은 백제멸망에 즈음해서 나당을 상대로 한 군사적 모험주의에 뛰어들었다"며 이는 "국교의 성립 이후 전개된 양국관계의 친연성에 뿌리가 있고 그것을 단절시키기 어려운 강한 결합력이 존재했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그는 "(왜정권은) 백제멸망 이후 현실노선에 따라 신라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새로운 국제관계를 모색해 나갔다"고 말했다.

한편 이인철 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7세기 고구려의 군사활동을 점검했다.

그는 "7세기에도 고구려의 무기와 무장이 백제나 신라에 비해서는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수당에 비해서는 열세였다"며 "이를 고구려는 산성을 쌓아 극복했다"고 밝혔다.

이교수는 "고구려가 요동지역에는 대규모 산성을 쌓아 그 안에 군민을 주둔시켜 수당의 침입에 대비한 반면 백제.신라 방면에는 소규모 보루를 쌓고, 동북지역의 말갈 방면에도 그다지 성을 쌓지 않았다"는 것은 "고구려가 이들 세력을 방어대상이라기 보다는 공격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었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처럼 말갈까지 세력권안에 넣었던 고구려가 멸망하게 된 것은 연개소문 사후의 권력 내분과 나당연합군의 전략을 사전에 충분히 간파하지 못한 결과"라고 보았다.

(연합뉴스 200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