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속에 살아 꿈틀거리는 고구려史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현을 가면 통구 12호분으로 명명된 고구려 벽화고분이 있다. 이곳의 북분 널방 왼벽에는 투구를 쓰고 비늘갑옷을 입은 무사 한 사람이 역시 비슷한 복장을 한 다른무사 한 사람의 목을 베는 순간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패자는 무릎을 꿇은 채 목을 늘어뜨렸으며, 승자는 왼손으로 패자의 투구끝을 잡고, 오른손에 쥔 환두대도(環頭大刀)를 높이 치켜든 상태이다. 승자는 오른발 못신으로 패자가 놓친 듯한 긴 창을 밟았고, 왼발의 못신으로는 긴 칼을 놓지 않고 있는 패자의 손등을 밟고 있다.

고구려 벽화고분을 20여년간 연구해온 저자는 책에서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부하를 모두 잃고 한 지방 군관의 손에 최후를 맞은 백제 성왕(聖王)의 모습을 떠올린다. 시대와 배경은 다르지만 당시 전투의 본질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 성왕의 최후를 마치 사진촬영하듯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울러 경주 등지의 대형 고분에서 나와 부장품 성격이 강한 것으로 추정해왔던 못신(금동신발)이 고구려 갑주무사의 필수품 중의 하나로 전투에 쓰기 위해 제작됐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고구려 고분벽화 중 고구려인들의 일상생활과 신앙을 보여주는 대표 장면들을 골라 대중들이 알기 쉽게 풀어쓴 책은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고조된 일반의 고구려사에 대한 의문이나 관심을 해소시켜주는데 도움을 준다.

책은 원래 국립중앙박물관이 내는 월간 ‘박물관신문’에 지난 2년여 연재했던 글을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고구려 벽화고분연구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울산대 역사문화학과에 재직중인 저자는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을 통틀어 지난 20여년간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에 천착해온 유일한 연구자이기도 하다.

책은 덕흥리고분의 ‘13군 태수 배례도’나 안악 3호분의 ‘대행렬도’처럼 벽화 한 장면씩을 주제로 삼아 발굴 이야기에서부터발견된 벽화가 학계에 불러일으킨 논쟁, 중국 혹은 서아시아 지역과의 교류양상 등 벽화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을 세밀하고 풍부하게 전달해준다.

가령 1500여년전 고구려 사람들이 서커스를 즐긴 사실을 보여주는 수산리 고분벽화의 교예 장면 서술의 경우 유사한 장면이 있는 팔청리벽화분이나 장천 1호분 같은 고구려 벽화고분은 물론 한대 화상전까지 동원되고 있다. 이를 통해 기원전 수세기 전부터 서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유행했던 ‘저글링’으로 불리는 손재주 묘기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 일대로 전해진 것을 알 수있다.

주인공의 경력을 놓고 북한 및 중국, 일본학계가 논쟁중인 덕흥리고분의 경우 저자가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고 각각의 입장차이를 객관적으로 정리해 보여준다. 이처럼 이 문제에 대한 최근의 정치적·감정적 대응을 배제하고 차분하게 접근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 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이 이 책을 펴낸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의 서술에서 도입한 비교문화적인 관점을 통해 고구려 문화가 가진 독자성을 곳곳에서 분명하고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신비감을 자아내지 않고 단순히 맹수일 뿐인 중국 당나라 벽화고분의 현무나 백호 그림과 달리 강서대묘의 ‘현무’와 강서중묘의 ‘백호’의 경우 신수(神獸)로서의 신비하고 기묘한 분위기가 가득하고, 바로 이것이 고구려가 벽화미술에서 발전시킨 특징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부록으로 실린 ‘고구려 문화와 고분벽화’는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의 사회와 문화를 개관한 글이다. 3세기말부터 무덤에 그려지기 시작한 고구려 고분벽화를 3시기로 나눠 지안과 평양 등 병립한 두 곳의 문화중심의 경쟁관계와 불교와 도교의 영향력의 변천 등을 통해 벽화미술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벽화여, 고구려를 말하라 / 전호태 지음 / 사계절::)

(문화일보 200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