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속의 만주]9. 조선, 화이관(華夷觀)을 넘어

“그대의 나라에 무슨 장기가 있었기에 능히 수나라와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 1488년(성종 19년) 2월17일, 쑤저우(蘇州)를 방문한 조선인 최부(崔溥)에게 명나라 관리들이 필담으로 건넨 질문이다. 같은해 1월 최부 일행이 탄 배는 제주도에서 목포로 가는 길에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에 표착했다. 명나라 당국은 최부가 조선의 신료임을 확인한 뒤, 일행을 송환하기 위해 베이징(北京)으로 호송하는 도중이었다. 뜻하지 않은 ‘강남 여행’ 중의 견문을 정리한 ‘표해록(漂海錄)’에서 최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적어 놓았다.

“뛰어난 신하와 용맹한 장수들은 병력을 다루는 재주가 있었고, 병졸들은 모두 솔선하여 윗사람을 위해 죽으려 했기에 고구려가 변방의 소국이었으면서도 천하의 백만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합쳐 한 나라가 되었으니 물산이 많고 재물이 넉넉하며, 군사는 충성스러우며, 유능한 선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위의 문답 내용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당시 명나라 관리들이 고구려와 조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부 또한 고구려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인식하고, 조선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처럼 고구려는 민족적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특히 조선 전기의 왕이나 관인들의 고구려에 대한 애정은 두드러졌다. 세종은 ‘신라 시조에게만 제사하자’는 주장을 물리치고 평양에 고구려의 시조를 모시는 묘사(廟祠)를 건립하고, 제사 의식을 정비토록 했다. 세조는 동명왕을 모신 사당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올리고, 수와 당이 국력을 기울여 침략했음에도 이를 물리쳤던 고구려의 ‘무용담’을 책으로 엮어 무신들을 교육시킬 것을 강조했다.

조선 전기에 나타나는 고구려에 대한 자부심은 ‘고구려의 고토’인 요동에 대한 은근한 관심과도 맞물려 있는 것이었다. 한 예로 연산군대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등은 압록강부터 요하(遼河)에 이르는 땅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정도였다.

명은 조선을 ‘고구려의 후예’로 인식하면서도 조선이 ‘고구려의 고토’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가질까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명 조정은 일찍이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을, 요동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가진 인물로 지목하여 제거하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15세기 초반에는, 조선 조정이 두만강 접경에 살고 있는 여진족을 회유하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이를 중단하라고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 심지어 명의 관인들 가운데는 임진왜란을, 조선이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여 일으킨 전쟁’이라고 왜곡하여 인식하는 인물도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고구려에 대한 인식은 조선 전기와는 다른 차원으로 전개되었다. 왜란 당시 조선에 참전했던 명군 지휘관들 가운데는 ‘군사 강국 고구려의 후예인 조선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쇠약해졌느냐?’고 의문을 표시하는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고구려와 달리, 조선이 ‘문약(文弱)’에 빠졌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을 부르고 결국에는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나름대로 ‘진단’을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왜란과 호란 이후 조선의 고구려, 나아가 만주에 대한 관심은 조선 전기에 비해 약화되는 조짐을 보인다. ‘야만족’이라고 멸시했던 만주족의 청에 병자호란을 통해 굴복하고, 이후 그들의 압박 때문에 국체(國體)를 유지하기에도 급급한 상황에서 고구려나 만주에 대한 관심을 드러낼 여유가 없었다. 특히 청이 만주지역을 자신들 ‘선조의 발상지’라고 신성시하고, 조선인들이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유입되는 것을 엄금하면서부터 조선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호란이 남긴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고, 사회경제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17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와 그 강역에 대한 관심은 되살아난다. 숙종은 신하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살수대첩’의 고사를 떠올리며 ‘병자호란의 치욕’을 회고하는가 하면 을지문덕을 모신 사우에 예관을 보내 제사를 올렸다. 영조는 동명왕릉을 수축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이 직접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렸다.

숙종대에는 이전까지 청의 엄중한 감시 때문에 방치되었던 두만강 유역의 국경 지방을 정비하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조선은, 베이징에 수도를 두고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청이 언젠가는 멸망하여 만주로 복귀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국경 정비사업은 그에 대비한 포석이기도 했다. 남구만(南九萬) 같은 이는 더 나아가 두만강 이북 지역(오늘날 간도에 해당)을 ‘이성계(李成桂) 선조들의 고향’이자 조선왕조를 있게 만든 ‘근원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고토’인 요동과 더불어 두만강 이북지역을 언젠가는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기도 했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고 양국의 경계가 정해졌지만 남구만 등이 지녔던 의식은 조선 말기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실제로 만주족의 청이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조선과 청 사이에 영토를 둘러싼 논란이 심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19세기 후반, 청이 흔들리고 한족 관료들이 외교 전면에 나서면서부터 ‘간도 문제’ 등이 불거졌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조선이 만주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가질까봐 두려워했던 것은 중화(中華)를 자처했던 한족 정권인 명이었다. 오늘날 중국이 옌볜 등지의 조선족에게 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조선 조정이 여진족을 회유하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명의 태도와 대단히 유사하다. ‘동북공정’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고구려 역사’를 제대로 지켜내려면 만주를 둘러싼 조선과 명·청의 신경전에 대한 보다 치밀한 역사적 이해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

(경향신문 200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