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토를 가다](상)고구려 대 당(唐)격전지 청석관

중국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인들의 기상은 세월을 관통해 오늘에도 살아 숨쉬고 있다. 고구려 고토(故土)인 중국 랴오닝(遼寧)성 가이저우(蓋州)시.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군대가 머물렀던 페이윈자이(飛雲寨)와 연개소문의 여동생 연개소정이 지켰다는 청석관(靑石關) 등이 가이저우시 곳곳에 남아 있다. 세계일보는 중국의 고구려사 역사왜곡(동북공정 프로젝트)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가운데 지난달 23일부터 5박6일간 한민족통일교육연구소 김금중 소장, 한중학술교류원 신혜원 원장, 발해대학교 한창희 교수와 함께 고구려와 당나라 전쟁의 흔적을 좇아 가이저우시와 동북3성(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 일대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했다.

◆1만 당군과 맞선 연개소정=가이저우는 만주대륙 7세기 때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곳은 지명의 유래에서부터 고구려의 흔적이 물씬 배어난다. 가이저우의 ‘蓋’자가 연개소문에서 유래됐다는 것이 이곳에선 정설로 통한다. 그뿐이랴. 이곳에선 ‘연개소문 온다’는 말 한마디면 우는 아이들도 울음을 뚝 그친다고 하니 고구려는 아직도 생생하다. 연개소문으로 상징되는 이곳의 고구려 흔적은 여동생 개소정의 유적으로 남아 있었다.

‘푸른 돌’이라는 뜻의 청석관이 가이저우 시내에서 차량으로 20여분 남짓 소요되는 산밑 둔턱에 자리잡고 있다.

문화혁명 이후 중국 정부에서 2차선 도로를 내는 바람에 원래 위치에서 10여m 벗어난 곳으로 옮겨졌지만, 푸른 빛을 띤 벽돌로 만들어진 청석관의 위용은 당당하다. 옆에 서 있는 비석엔 고구려인들의 웅혼했던 기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곳은 연개소문이 격전을 치른 청석관이다. 연개소문의 여동생 개소정 장군이 지킨 자리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동벌하는 데 개소정이 이곳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지켰다. 이 관은 아주 험준해 만병(萬兵)이 들어와도 혼자서 다 지켰다.”

김금중 소장은 “청석관을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산 정상에는 고구려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봉화대가 많다”면서 “고구려와 당나라의 거센 투쟁의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청석관은 올라가는 입구조차 변변치 않다. 주위에 마른 풀이 무성하다. 방치돼 있다는 느낌을 준다. 유적지로서 제 대접을 못받고 있는 것이다.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잊혀지는 고구려 주둔지=가이저우 시내에서 청석관을 지나 한 구비를 돌면 연개소문의 군대가 주둔한 곳으로 알려진 페이윈자이 어귀에 다다른다.

답사팀의 김 소장 일행은 이곳이 당나라와 결사항전을 벌이던 연개소문 군대가 머문 격전지라고 했다. 1996년 이곳의 고구려 유적을 발굴했던 김 소장이 고구려인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을 발견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구려의 흔적을 찾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드넓게 펼쳐진 옥수수밭을 끼고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 보일 듯 말 듯 ‘비운체’라는 지명 푯말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사료의 뒷받침이 없으면 그저 중국의 시골마을일 뿐이다. 김 소장 일행이 발굴했던 우물터마저 다시 옥수수밭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 마을에서 고구려는 정사보다는 구전설화로 전해온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은 “이곳에서는 개소정이 오빠인 개소문에게 ‘당군이 쳐들어온다’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나중에 정작 당군이 올 때는 개소문이 지원해주지 않아 전사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고 귀띔했다.

(세계일보 200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