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외교관계 패착으로 멸망했다”

이기동 교수 '…신라 외교의 묘체' 논문
中 침략야욕 유연하게 달랬다면 번영 누렸을 것

고구려는 왜 멸망했을까? 한때 동북아시아의 최대 강국으로 부상했고, 중원을 통일한 수·당의 끈질긴 침략에도 굳건히 맞섰던 고구려는 왜 그렇게 갑자기 몰락했을까? 오랜 전쟁을 통한 국력의 소진, 연개소문(淵蓋蘇文) 사후의 내분 등이 그 이유로 지목돼 왔으나 아무래도 어딘가 의문은 남는다.

이기동(李基東) 동국대 교수가 최근 쓴 ‘수·당의 제국주의와 신라 외교의 묘체(妙諦)’는 삼국시대 말기의 국제정세를 분석, “국제적 외교관계에서의 패착이야말로 고구려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12일 오전 10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주최 학술회의 ‘7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에서 이 내용을 기조강연으로 발표한다.

이 교수는 7세기 동아시아 세계를 뒤흔든 근원적인 힘은 300년 가까이 남북조의 양대 세력으로 분열됐던 중국이 수·당에 의해 다시금 통일돼 ‘공전의 강력한 세계제국의 출현’을 낳은 데 있다고 분석한다. 통일된 중국은 돌궐과 토욕혼 등 내륙아시아 각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전쟁에 나섰지만 고구려는 중국의 지배질서에 맞서 번신(藩臣)의 예를 끝내 거부했다. 이 같은 위기상황 속에서 고구려·백제·신라는 모두 쿠데타와 같은 정변을 경험하면서 중앙집권적 정치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수·당은 고구려에 대규모의 침략전쟁을 일으켰지만 고구려는 이를 잘 막아냈다. 서기 645년 안시성에서 패한 당 태종이 참담하게 퇴각한 것은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후퇴에 비유할 만한 사건이었다.

‘정관(貞觀)의 치(治)’로 알려진 당 태종대의 태평성대는 결국 이로 인해 파탄을 맞게 된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이로부터 20여년 후 고구려가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된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고구려는 결코 전쟁 일변도로 수·당에 맞선 것이 아니었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외교적 수완으로써 수 양제를 마음대로 조종했고, 연개소문은 북방민족 설연타(薛延陀)가 당에 등을 돌리도록 손을 썼다. 그런데도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당시 당나라가 ‘한창 중천에 높이 뜬 태양’이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 교수는 말한다. 이 시기는 중국의 대외 팽창이 역사상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이 교수는 “고구려는 660년대의 격류에서 잠시 발을 뺄 적절한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고구려가 보다 유연한 자세를 취해 무후(武后) 집권 초기의 신경질적 침략 야욕을 조금만 완화시켰다면 머지않아 대외 위기가 사라져서 오랫동안 안녕을 구가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반면 이 역사적 격동의 최대 수혜자였던 신라는 당시 동아시아의 도도한 흐름을 역류시킬 만한 힘은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시대의 조류를 자국에 맞게 이용, ‘작은 규모의 통일’이나마 달성할 수 있었다. 신라는 처음 동맹을 망설이던 중국의 입장을 교묘히 이용한 뒤 분열된 민족의 힘을 신라의 깃발 아래 결속했다. 그런 외교전의 성패가 엇갈림에 따라 고구려가 ‘보다 큰 규모의 한민족 통일’을 이루는 데 좌절한 것이라고 이 교수는 지적한다.

(조선일보 200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