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환박사 “고구려, 중국과 무관한 다종족 국가”

“강인하고 꿋꿋한 기상, 광활한 영토, 장대한 역사…. 우리는 고구려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고구려에 대한 기대감의 표현이지요. 그러나 추상적인 이미지만으로는 고구려사를 올바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고구려사의 내면과 그 역사적 사실에 눈길을 돌려야 하지요. 이 책은 바로 고구려의 외형이 아닌 내면을 파고든 연구서라고 할 수 있지요.”

20여년간 고구려사를 연구해온 임기환 박사(47·한신대 학술원 연구원)는 자신의 첫 연구서인 ‘고구려 정치사 연구’(한나래)를 이렇게 소개했다. 고구려 정치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이 책은 고구려 국가형성에서 멸망까지 700여년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고구려가 어떻게 독자적인 정치체계를 구축하며 동북아의 강자로 부상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책은 고구려의 정치제도를 초기 나부(那部)체제-중기 집권적 관료체제-후기 귀족 연립체제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신들의 지방정권의 하나라고 주장하지만, 고구려는 처음부터 독자적인 정치체제를 갖추었습니다. 특히 국가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5부 체제는 초기 고구려 사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고구려가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국가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국과 다른 고구려 정치체제의 특징은 형(兄), 사자(使者) 등의 독자적인 관직명에서도 잘 나타난다. 임박사는 태대형·위두대형·대형·소형 등에서 보이는 ‘형’은 족장세력을 편제하는 관직으로, 태대사자·대사자·상위사자 등에 나타나는 ‘사자’는 왕권을 수행하는 관직명으로 이해했다. 부족연맹체에서 중앙 집권적 관료체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초기 사회의 특징이 그대로 관직명에 반영됐다는 얘기다.

임박사는 고대사 연구의 취약점인 사료 부족이라는 장애를 넘어서기 위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중국측 사료는 물론 벽화, 금석문 등을 폭넓게 활용했다. 특히 안악3호분, 덕흥리 고분벽화에 나타난 묵서명 연구를 통해 4~5세기 낙랑·대방 지역이 중국의 독자적인 집단에 의해 지배됐다는 기존 학설을 비판, 중국 교군(僑郡·중국의 명예직 태수가 다스리는 군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또 연개소문 정권에 대해서도 공적 정치질서를 해체하고 사적 기반 강화를 노린 정권으로, ‘민족적 기개’와는 거리가 멀다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실증적 자료를 토대로 고구려 국가의 발전과정과 사회성격을 규명한 저자는 고구려가 중원의 거대 국가와 맞서며 7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다종족 국가로 다양한 북방문화를 수용하는 유연성을 지녔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고구려는 부여, 옥저, 동예, 숙신, 선비 등 만주, 한반도 북부의 다수 종족 집단을 통합한 최초의 통일국가입니다. 중국 문화 일변에 빠지지 않고 북방의 유목문화 등 다원적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 대륙의 제국을 유지한 비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임박사는 “기초 자료가 적은 데다 북한과 중국의 연구성과를 접하기 어려워 힘들었다”며 “1일 출범한 고구려사 연구재단이 고구려를 비롯한 고대북방사에 대한 연구의 구심체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200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