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북방 고대사] ⑧김지하 ‘생명과 평화의 길’

“中, 고구려史 편입시도는 잃는게 더 많을 것”

평화!

삶 자체로부터 오는 참다운 평화가 아니라면 전쟁뿐이다. 거짓 평화란 없다. 우리는 내면으로부터 지극히 평화를 기리면서도 현실에 있어 아슬아슬한 목전의 전쟁에 부딪치고 있다. 전쟁에 대한 예감이나 담론 자체가 전쟁이요, 매일매일의 전쟁 논리가 곧 전쟁의 시작이다. 우리는 매일 매시간 평화를 외치면서도 실제에 있어 매일 매시간 전쟁에 접근하고 있다. 그것은 아메리카에 관련된 것이거나 일본에 대한 것이었고, 흔히는 북한에 관한 얘기였으나 지금은 그것이 중국이다.

중국!

먼 서양인들의 눈에는 한국과 얼추 비슷하면서도 엄연히 서로 다른 그 중국이 단순한 예감의 차원을 넘어 전쟁의 확실한 가능성의 한계 안으로 다가들었다. 중요한 것은 우선 상식화된 우리의 논리다. “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네가 아니다.” “너와 나는 언제나 싸우는 것이니, 너와 나 가운데 어느 하나가 이김으로써 상대를 흡수 통합한다.”

이미 이렇게 우리는 마음 안에서, 이야기 속에서, 사유 속에서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먼저 이 내면과 상식의 영역에서 평화를 생활화하지 않으면 현실의 ‘악무한’(惡無限)인 전쟁으로부터 결코 탈출하지 못한다. 분명히 말한다.

탈출하지 못한다!

왜?

우선 동아시아는 그 자체의 독특한 문명적 ‘반대일치(反對一致)’ 안에 있다. 아직까지도 확실한 지역적인 경제공동체나 ‘시장합석(市場合席)’, 그리고 ‘호혜(互惠)의 망(網)’을 건설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유(儒)·불(佛)·선(仙) 등의 청천백일 같은 전통가치는 뚜렷이 공유하고 있다.

어쩌면 ‘반대일치’가 아니라 ‘일치된 반대’일 수도 있고, 그런가 하면 문명 후반의 지리멸렬이 아니라 오히려 새 문명의 새파랗고 확실한 가능성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오늘의 진화론은 ‘군집(群集)의 개별화(個別化)’가 아니라 ‘개별성들 안에서의 얼룩덜룩한 군집화’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어느 쪽에서부터 제 길을 제대로 가지 않고 있음이다. 그 가장 명백한 국제적 오류는 중국에서부터 나온다. 민족적 패권주의나 중국제일주의가 곧 자기가 늘 지니고 있어야 할 문화대국으로서의 큰 포부, 큰 경륜을 애써 깨뜨리고 있음이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 자신의 소명과 경륜을 스스로 더럽히고 짓밟고 있으니―왈,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다

‘공정(工程)’에 대응하는 주변 민족들의 태도는 어떤 것일까? 얼마 전에 만난 베트남 작가동맹 서기장 휴틴은 가라사대 “베트남은 작은 나라고, 중국은 큰 나라다. 양자 사이엔 프렌드십이 있을 뿐이다. 허허허.” 이 말을 반복하며 계속 웃고 있는 그 웃음에서 중국 민족이 동아시아 여러 민족에 가한 상흔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베트남의 그런 전술적 태도가 아닌 한국인의 눈시리도록 명백한 대응으로서의 네 가지 얘기를 한편 한숨, 또 한편 실소(失笑)로 낮게, 느리게 띄엄띄엄 말해주던 일이 생각난다.

“첫째, 중국인을 포함해서 동아시아의 모든 민족이 다 참여하는 고대 아시아 문예부흥이 일어나야 한다. 둘째, 미래의 새 문화를 창조하는 데에 장애물이 되는 관료주의에 대해 전 세계인이 참가하는 평화적인 문화대개벽이 일어나야 한다. 셋째, 우주 또는 지구생명학을 학제적(學際的) 차원에서 탐색하면서 전 세계가 참가하는 인간과 비인간 전부의 생명 공동 주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넷째, 이 세 가지 문화운동을 위해 문(文)·사(史)·철(哲)을 종합하는 새로운 문화이론이 불붙어야 한다. 우선 한국과 베트남 작가들이 선두에 서자.”

나는 지금 이 네 가지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섬뜩해진다.

혼자서 아시아 고대 문예부흥 역할에 핏대를 올리던 때의 그 가슴시린 외로움 곁에, 한민족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민족들과 함께 우리 고대를 살펴봤으면 한다. 긴급한 경제적 어려움 외에도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문제들은 너무나 많다. 우리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야 할 동아시아 나름의 숙제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 공동체·호혜망 등등. 나는 이 글을 다음의 말로 끝맺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사상이다. 동아시아가 한데 손잡고 위급한 세계사상사에 기여해야 할 부분은 역시 사상이다. 그러나 사상 문제가 바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현대의 특징인 것을 어쩌랴. 긴급한 것이다.

(조선일보 200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