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솟대·장승문화의 뿌리

북풍 한설 몰아치는 날, 한적한 시골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서 음산한 기운을 느낀다.

친근하게 보이던 장승이 오늘은 눈을 더 부라리고, 입을 더욱 벌리며 지나가는 길손을 호령하고 있다. 그것도 장승 두 분이 짝을 지었으니.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눈을 피하며 나지막하게 고한다.

‘그저 죄 많은 인간 굽어살피소서.’ 마을 안쪽으로 몇 걸음 더 들어가니 실타래를 허리춤에 묶고 오색 천을 늘어뜨린 당목(堂木)이 동장군과 맞서 위풍당당하게 서 있고, 그 앞에는 누군가 방금 치성을 드린 듯 북어 한 마리와 쌀 밥 한 덩어리가 얌전히 놓여 있다. 이 정도면 가히 다가오는 봄이 무색할 정도로 스산한 분위기다.

우리 민족에 있어서 수목(樹木) 신앙의 대표적인 신체(神體)로는 솟대와 장승과 당목이 있다. 솟대는 긴 장대 위에 새 모양의 조형물을 얹어 놓은 신체다. 문헌에 보이는 솟대의 기원은 “삼국지” “동이전”의 소도(蘇塗)에 있다.

소도는 큰 나무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신을 섬기는 별읍(別邑)을 칭하는데, 이곳으로 도망한 자는 끌어낼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지역이다. 장승은 지역에 따라 벅수·수살목·하르방 등으로 다양하게 칭해지는데, 이는 마을에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신체다.

뒷날 마을과 사찰의 경계표지 내지 이정표로서의 역할도 하나, 장승의 근원적 의미는 마을 수호신 자체다. 당목은 동제(洞祭)의 주안처가 되는 곳이며, 마을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치성을 드리는 대표적인 신체다. 당목은 우주목으로서 명실상부한 마을의 중심이 되는 나무이며, 마을의 수호신이다.

이런 수목신앙의 근원은 우리의 신화 주인공들이 한결같이 나무나 숲, 또는 산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데에 있다.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을 낳은 환웅은 태백산 신단수로,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을 낳은 해모수는 웅신산으로,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는 양산으로,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는 구지봉으로 내려왔다.

나무는 곧 신의 하강처이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통로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나무는 후대에 신의 거처로, 신의 제사처로 인식되었다. 오늘날의 솟대·장승·당목은 우리의 신화 주인공들이 강림한 나무의 후래적 변용 형태인 것이다.

천하의 건달인 변강쇠가 옹녀를 만나 지리산 자락에 정착한 뒤, 나무를 해오라는 옹녀의 채근을 견디다 못해 빈 지게를 지고 덜렁덜렁 길을 나선다.

잠시 후, 게으른 변강쇠의 눈에 기가 막힌 땔감이 들어온다. 바싹 잘 마른 데다가 잔가지 하나 안 붙어 있고, 그것도 두 그루나 되니 좋아 죽을 지경이다. 힘이 장사인 변강쇠가 번쩍 들어 뽑아 지게에 지고 돌아와 불쏘시개로 쓴 것은 바로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장승이었다.

이로 인해 변강쇠는 팔도 장승 대표들의 탄원으로 옥황상제의 허락 아래 여덟가지 병을 한번에 받는, 이른바 장승 동티로 서서 죽는다. ‘변강쇠타령’의 한 대목이다. 상상과는 달리 신성불가침의 장승을 훼손한 자의 처절한 말로를 그리고 있다.

한때 대학가에서는 장승과 솟대를 세우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무참히 잘려 나가 바닥에 뒹굴었다. 이를 다시 깎아 세우자, 또 다시 허리가 잘려 나가는 일이 몇차례 반복되었다.

전통과 혁신의 갈등이자 어제와 오늘의 대결이었다. 소도가 명동 성당이나 조계사로 옮아간 오늘, 솟대와 장승과 당목에서 우리의 삶의 뿌리를 되돌아보고, 오늘의 삶을 되짚어보는 일은 어리석은 일인가.

더욱이 이런 생각은 오늘날 또 다른 신성 모독이 되는 일인가.

전통적 삶을 고리타분하고 미신적인 것으로 팽개치지 않는 토대 위에서 변화를 추구할 때, 진정한 혁신도 있고 굳건한 내일도 있 을 것이다.

숨가쁘게 움직이고 발빠르게 바뀌는 세태 속에서 수백년, 수천년 지나도록 우직하게 내려오는 우리 삶의 양식을 강추위 속에서 버티고 서 있는 마른 나무에서 확인한다.

[김문태 / 성균관대 강사 국문학]

(문화일보 2004-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