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영토복원 활동

고려시대가 되면서 만주는 한민족의 영역 밖에 있는 땅이었다. 고려가 건국할 당시의 고구려 영토는 평양 정도에 불과했다. 태조는 즉위한 지 석 달도 채 안되어 황폐해진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에 백성을 옮겨 살게 하고, 대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4촌인 왕식렴 등을 보내 지키게 하였다.

평양을 시작으로 태조는 북방 개척에 나서 여러 개의 성을 쌓았다. 태조 사후에도 북진정책은 계속 추진하였지만, 압록강을 건너지는 못하였다. 성종 때 소손녕과 담판한 서희의 공로로 압록강 동쪽의 여섯 주(州)를 얻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만주지방에는 이미 요나라가 강력한 국가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나라 때에는 만주지방이 원의 지배에 놓였다. 고려도 원에 복속되어 이른바 부마국이 되었다.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였던 충선왕은 고려의 왕과 심왕(瀋王)을 겸하였다. 만주 일대에는 고려와 몽골이 40년 가까이 전쟁하는 동안 이주한 고려인이 많았는데, 심왕은 이들 고려인을 다스리는 왕이었다.

명나라가 건국해 요동에 진출하면서 만주지역을 석권했다. 명은 1385년 요동공략에 나섰고, 3년 후에는 북원(北元)의 근거지를 토벌하였다. 이 때문에 명이 여세를 몰아 침략해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려에 조성되었다. 실제로 명에서는 전함을 동원하여 고려를 공격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게다가 명은 지나치게 많은 말과 소를 공물로 요구했고, 심지어는 처녀, 환곡 등도 요구할 것이라는 소식도 전해졌다.

고려의 요동정벌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싹텄다. 그러나 요동정벌의 직접적인 계기는 1388년 명의 철령위 설치 통고였다. 명은 철령 이북(지금의 함북 일대)에 철령위를 설치하여 자신의 영토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이 지역은 원이 쌍성총관부를 설치했지만,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단행하면서 수복한 곳이다.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결과 영토를 떼어줄 수도 없고 전쟁도 할 수 없으니, 외교적으로 해결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우왕과 최영은 요동공략을 단행했지만,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중단되었다. 이때의 요동정벌은 사실상 만주에 대한 마지막 영유권 확보 시도였다.

(경향신문 2004-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