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 회복’ 북진정책 麗末까지 이어져

[韓國史속의 만주](8)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고구려의 고토였던 만주지역은 고려시대에는 이미 통치 범위를 벗어난 땅이었다. 물론 고구려의 서울이었던 평양을 차지하여 서경으로 삼았으므로 고려는 영토상으로도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고려는 자신이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역사계승의식을 갖고 있었고 여러 가지 고구려 문화를 이어받았다. 고려를 건국한 주체세력은 자신들이 세운 국가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표방하기 위해 나라 이름을 고려로 정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기 위해 북진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신라에 비해서는 고구려의 구토를 많이 회복했지만,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차지하지는 못했다. 거기에는 요나라가 굳세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려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단순히 땅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아니라 정신과 문화로 이어지는 역사의식을 통해서 계승관계를 정립한 것이다.

고려 사람들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여러 군데서 볼 수 있다. 성종 12년 요나라가 침입해 왔을 때, 서희는 요의 대장 소손녕과 담판하면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당당히 선언하여 강동 6주를 차지하였다. 인종 때의 문신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동일하게 고려의 전대(前代) 국가였음을 밝혔다.

-이규보 ‘동명왕편’ 국가승계 입증-

고려가 고구려를 역사적으로 계승한 국가임을 밝힌 대표적인 작품은 ‘동명왕편’이라고 하겠다. 1193년에 이규보가 쓴 이 장편 서사시는 민간에 떠도는 동명왕의 건국 설화를 재구성한 것으로, 고구려가 천손(天孫)의 후예가 세운 나라임을 강조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명설화를 ‘귀환(鬼幻)’의 차원에서 나라를 건국한 ‘성신(聖神)’의 사적으로 승격시키고, 고려 역시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표방하였다. 그렇게 높게 평가되었으므로 동명왕은 고려시대에도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평양에는 동명왕의 사당을 두었고, 매년 국가가 제사를 지낼 정도였다.

고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만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였다. 고려에 이어진 대표적인 고구려의 문화는 돌방 무덤, 특히 벽화를 그린 돌방 무덤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지안(集安)과 평양 일원에 수많은 벽화 무덤을 남긴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삼국 가운데서도 고구려만 유독 다양한 소재의 벽화를 무덤 속에 남겼고, 그 때문에 고분 벽화는 고구려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다.

고려의 왕과 지배층의 무덤에는 돌방을 만들고 벽화를 그렸다. 물론 고구려의 돌방이나 벽화와 꼭 같지는 않았지만, 벽화를 그리는 돌방식 무덤은 전형적인 고구려 무덤 형식이다.

돌방에 벽화를 그리는 전통은 고구려가 멸망한 7세기 후반에 사라졌을 터인데, 그것이 다시 등장하게 된 연유는 아직 분명치 않다. 고려 벽화가 요나라의 풍습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요가 보내온 낙타를 만부교 밑에 매어 놓고 굶겨 죽일 정도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던 태조의 무덤을 만들면서 요의 형식을 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역시 돌방에 벽화를 그리는 무덤 형식은 고구려의 것을 계승한 것이다. 비록 고구려는 250년 전에 망했지만, 그들의 무덤 양식은 평양을 비롯한 옛 고구려 중심지에 면면히 남아 있었고, 고려가 건국하여 다시 살려낸 것이리라.

무인정권의 핍박을 받고 폐위된 희종 같은 왕을 제외하면, 왕들의 무덤에는 모두 벽화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태조를 비롯해 3대 정종, 문종, 명종, 신종, 원종, 충목왕, 공민왕과 왕비의 무덤에 벽화를 그렸다. 왕뿐 아니라 관료들도 벽화 무덤에 묻혔다. 개풍 수락암동 1호분, 장단 법당방, 거창 둔마리, 파주 서곡리, 서삼동 고분 등은 고위관료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파주 서곡리 무덤은 공민왕 초기에 죽은 당대의 권력가 권준(權準)의 것이다.

고려 벽화의 소재는 나무, 인물도, 풍속도, 사신도, 연꽃, 별, 사신도 등 다양하며, 그 소재나 모티브는 고구려의 것과 매우 흡사하다. 특히 연꽃 그림과 사신도는 고구려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사신도는 장수왕 말년 무렵에 벽화의 주류가 된 뒤 평양 일대에 사신도를 그린 벽화고분이 널리 분포한다. 권준의 무덤에서 주인공을 북벽에 배치한 양식도 씨름무덤(각저총)을 비롯한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며, 동서벽에 서 있는 인물상은 덕흥리고분의 13군태수하례도와 같은 모티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무덤양식 왕묘 대부분 판박-

이석실에 벽화를 그리는 전통은, 놀랍게도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세종 28년에 죽은 소헌왕후의 무덤 석실 네 벽에 사신도를 그리고 천장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은하(銀河)를 그린 사실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2000년 밀양에서 발굴된 고려 말기의 충신 박익(朴翊)의 돌방 무덤에서도 벽화가 발견되었다. 천장에는 별 그림, 동서벽에는 각기 12명씩의 남녀가 각종 물품을 들고 걸어가는 그림, 남벽에는 말 2필과 마부 2명이 대기하고 있는 벽화다. 안악3호분이나 덕흥리고분의 풍속화가 재현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벽화이다. 이 인물들은 전체적으로 고려시대의 인물 묘사법을 따라 그렸지만, 눈을 크고 들뜬 모습으로 그린 것은 덕흥리 벽화고분의 인물들을 연상케 한다고 평가된다.

돌방을 만들고 벽화를 그리는 무덤 방식은 조선 초기 세조가 석실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함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다. 대신 ‘주자가례’에 의한 회격(灰隔·관과 구덩이 사이의 공간을 석회로 다져 넣는 것) 묘제가 널리 유행하게 됐다.

-아차산성 항아리 현대와 비슷-

한강유역까지 진출했던 고구려가 남긴 아차산성에서 출토된 항아리를 보면, 오늘날 장이나 김장을 담글 때 사용하는 큰 항아리와 형태가 아주 흡사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고구려 토기는 바닥이 납작한 평저형이 많은 점이 특색이다. 음료나 곡식을 저장하는 데 사용된 바닥이 평평한 큰 항아리는 고구려 중기 이후에 많이 사용되었고, 발해시기까지도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역시 아차산에서 발굴된 온돌 시설은 고구려의 문화가 중국이 아니라 한반도에 그대로 전수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고구려는 멸망했고 그 땅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지만, 고려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국가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자부하였다. 또한 고구려 사람들이 창조한 문화와 관습을 문화와 생활 속에서 그대로 혹은 창조적으로 이어갔으며, 그러한 생활과 관습이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하는 계승의식을 갖게 한 바탕이 되었다.

〈안병우/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경향신문 2004-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