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주인, 벽화는 알고있다

고구려 역사가 누구 것이냐 하는 논쟁이 격화된 마당에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며 옛 고구려인들과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너무 한가로운 일 아닐까. 20년 넘게 고구려 고분벽화를 연구한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 학과 교수는 뻔하디 뻔한 질타를 예상하면서도 어떠한 정치적 입장도 취하길 피한다. 그저 '벽화여, 고구려를 말하라'(사계절 펴냄)며 고구려 벽화 속으로 은둔하려는 듯하다.

그러나 고구려 벽화 속으로의 잠입은 벽화의 주인공들과 그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살려낸다. 그렇게 '누구의 역사?'에 앞서 따지는 '어떤 역사? '에 대한 고찰은 예상하지 못한 강력한 파괴력을 지난다. 고구려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우리는 중국과 아무런 관계 없네"라고 말하게 하는 듯 하다.

전 교수는 어느 순간 강서대묘 안벽 벽화의 현무를 유심히 본다. 뱀과 거북이 어울린 기괴한 짐승 현무. 그런데 이 현무는 당나라 시기 중국 서안의 한 묘에 있는 현무 그림과 판이하지 않은가. 현무가 담긴 벽화 들은 고구려와 중국, 두 문화권을 함부로 엮어대는 것을 비웃는다.

현무뿐이랴. 각저총 씨름도에 등장하는 서역 인물, 그리고 삼실총의 역사(力士)는 중국과는 무관한 고구려의 서아시아 교류를 보여준다. 오회 분에 등장하는 농사의 신도 당시 동아시아 지역 어느 곳에서도 사례를 찾기 힘든 독특함을 내뿜는다.

전 교수는 또 고구려와 조선의 내밀한 연속성을 천문도를 통해 보여준다. 역시 큰소리 내지 않고 스스로 말하게 할 따름이다. 조선 초 만들어진 별자리 그림판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대해 전 교수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 대동강에 빠뜨린 석각천문도의 탁본이 되살아난 것"이란 당시 학자 권근의 글을 인용한다. 석각천문도의 탁본은 소실됐지만 덕화리 2호분의 별자리는 권근의 설명을 방증하는 유적이란 설명이다.

굳이 최근의 논쟁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전 교수의 연구를 일별하는 것은 고대인들의 생활을 체감하는 즐거움을 준다. 수산리 벽화분에서는 그들이 즐겼던 서커스를 감상할 수 있고, 통구 12호분에서는 적군 장수의 목을 베는 고구려 무사의 담대함을 엿볼 수 있다.

전 교수는 "고분벽화는 그 시대를 살던 사람의 생각, 시대의 문화가 담긴 역사의 증언"이라며 "벽화 구성과 내용에 대한 분석 작업은 고구려 사회ㆍ문화적 전개 과정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 있다"고 말했다.

(매일경제 2004-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