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북방고대사/⑤] 문명·종족 다양했던 고구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에 걸쳐 고구려는 북방을 향해 대규모의 정복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전성기인 5세기 후반부터 100년에 걸쳐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 요하(遼河) 유역, 북쪽으로는 농안(農安) 또는 그 이북, 동쪽으로는 두만강 하구 유역과 연해주 일부, 남쪽으로는 경기만~소백산맥 이남~삼척을 잇는 지역으로 팽창했다.

뿐만 아니라 이 영역 너머 유목 지역에 대한 간접지배 방식을 고려할 때 고구려의 영향권은 더욱 확대됐을 것이다. 황해 중부 이북, 동해 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한 고구려는 해양 활동도 활발하였으니, 일본 열도로 진출했을 가능성도 크다.

이처럼 영토가 커지면서 고구려란 나라는 폭넓고 다양한 자연환경을 갖게 됐다. 송화강·두만강·혼하·요하·눈강 등 길고 수량이 많은 큰 강이 있었고, 산악 지형도 처음 나라를 세웠던 길림과 집안 지역뿐 아니라 한반도 북부의 여러 지역과 연해주 지역, 흥안령의 대삼림 등으로 확대됐다.

요동의 넓은 평원, 북방의 초원, 호수 등을 골고루 가졌고 남쪽으로 진출하여 비옥한 농토를 얻었다. 건조한 초원, 겨울에 몹시 추운 아한대 삼림지대, 따뜻하고 강수량이 많은 온대 등 기후에 따른 식생대도 아주 다양했다.

이런 다양한 자연환경은 경제양식의 차이는 물론 생활방식, 집단의 세계관과 신앙 등 문화의 형태와 성격에 다양성을 불러왔다.

농경문화가 무엇보다 굳건한 토대를 이루었다. 요동반도의 남단과 황해도·한강 유역의 경기만 지역에서 농사가 발전했다. 부여의 옛땅인 송요평원 역시 농경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북방과 서북방으로는 유목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북류(北流) 송화강 하류와 눈강 하류 및 동류(東流) 송화강이 만나는 지역은 끝없는 초원지대로서 일찍부터 유목문화가 발달했다. 거기다가 거란(契丹)을 거쳐 유연(柔然) 돌궐(突厥) 등과 충돌하면서 유목 문화의 성격을 흡수해들였다.

고구려가 하늘의 자손임을 주장하고, 기마문화를 중시하며, 고분 벽화에 별자리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유목문화의 영향이다. 이 지역의 산물인 명마(名馬)는 고구려의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고구려는 흥안령 산록에 사는 실위(室韋) 집단과 철을 팔고 말을 사는 마철(馬鐵) 교역을 추진하였고, 남쪽인 송(宋)에 800필의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동북쪽에서는 삼림·수렵문화가 발전했다. 동옥저로부터는 담비 가죽을 조세로 받았다. 담비 가죽은 북옥저와 접한 읍루(?婁)에서도 명산품으로 취급됐다.

동만주 일대와 연해주 지역은 동류 송화강의 일부와 우수리강이 흐르고 삼림이 무성한 지역으로 지금도 주변 종족은 어렵과 수렵으로 생활하고 있다.

고구려의 해양 문화는 일찍부터 동해에서 해조류 등을 채취하고 소금을 생산했으며, 고래를 잡는 등 다양하게 발전했다. 태조왕 때 압록강 하구인 서안평(지금의 단동 지역)을 공격한 이후 계속 황해로 진출을 시도한 고구려는 미천왕에 이르러 드디어 숙원을 풀었다.

경기만을 장악하고 요동반도를 영토화한 이후에는 황해 중부 이북은 물론 요동만도 고구려의 내해(內海)가 됐다. 이처럼 성장한 해양 능력을 토대로 양자강 유역의 송나라 등 남조(南朝)의 여러 국가들과 빈번하게 교섭하면서 남방 해양문화가 들어왔다. 일본 열도와 바다를 건너 문화교류를 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고구려는 거대한 영토 안에 다양한 자연환경과 이질적인 문화가 공존하는 다문화 국가였다. 대륙과 해양, 반도를 동시에 가지면서 서로 다른 여러 문화가 어우러지는 경험을 가졌던 것은 우리 역사상 고구려가 유일하다.

(조선일보 2004-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