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문제 도외시하고 동북공정 대응할 수 있나"

"고구려사 연구만 하겠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심각한 기만입니다."

2월 12일 고구려연구재단(가칭) 설립추진을 위한 공청회에서 동국대 철학과 홍윤기 교수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정부 지원으로 설립되는 연구단체의 명칭이 '고구려연구재단'으로 좁혀지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날 공청회에서 명칭 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간도 때문에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에서 시작됐다. 동아대 윤휘탁 교수(동양사)는 "동북공정의 핵심은 영토 문제와 민족 문제"라고 주장했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중국 근-현대사)는 "중국은 간도 문제 때문에 과거사를 왜곡하려고 한다"면서 "간도 문제를 비롯한 근-현대사 문제를 도외시하고 어떻게 동북공정에 맞대응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중국, 간도 때문에 과거사 왜곡"

연구단체의 구성과 운영방향 등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한 이날 공청회는 명칭 문제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2시부터 시작된 공청회는 예정된 시간인 오후 5시를 넘겨 6시 이후에야 끝마쳤다. 마지막까지 논쟁은 명칭 문제에 머물렀다. 시민단체와 외부 학자들은 '동북아연구재단' 같은 포괄적인 명칭을 요구했다. 고대사 연구 학자들은 '고구려연구재단'이란 명칭을 고집했다.

발제자로 참여한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고구려사)는 "명칭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면서 "한중관계사-민족 문제 연구팀이 있는 만큼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했다. 발제안에 따르면 모두 6개팀 중 고구려역사연구팀과 고구려문화연구팀, 2개팀이 고구려사를 연구한다. 상고사-발해사연구팀을 포함하면 4개의 고대사연구팀이 있다. 한중관계사-민족문제연구팀, 2개 팀이 국경과 민족 문제를 연구하게 된다. 

토론자인 박원철 고구려역사지키기 범민족시민연대 대표와 서길수 서경대 교수(고구려연구회장), 안병우 한신대 교수(한국사)는 '동북아연구재단' '동아시아역사연구재단' 같은 포괄적인 명칭을 주장했다. 박원철 대표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확보하려는 것"이라며 "미래에 대한 대응방안을 도출하는 데 있어 '고구려연구재단'이란 명칭은 너무 폭이 좁다"고 주장했다.

오랫동안 고구려연구회를 이끌어온 서길수 교수는 "한 교수가 나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고구려사를 연구해왔으면서 왜 다른 명칭을 주장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면서 "하지만 중국의 극단적인 중화사상의 오류를 제대로 지적하려면 동북아사연구재단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발제와 토론 후 이어진 방청객들의 발언에서도 명칭 문제가 쟁점으로 거론됐다. 고대사 전공 교수를 제외한 대다수 발언자는 '동북아연구재단'이란 명칭이 옳다고 주장했다. 윤휘탁 교수는 "연구재단의 목표가 고구려사를 연구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중국의 역사왜곡을 바로잡겠다는 것인지 분명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 교수는 "고구려사 문제는 동북공정에서 1차적으로 발표된 것뿐이지 조-청 국경 문제와 관련한 논문은 앞으로 중국에서 계속 쏟아져나올 것"이라며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말했다.

남북한 현대사를 연구한다는 한 발언자는 "통일 이후 영토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고구려연구재단이란 명칭으로 어떻게 간도 문제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왔다는 한 발언자는 "중국이 동북 지역의 이권 확보를 염두에 두고 있는 만큼 간도와 영토-국경 문제에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명칭 문제와 관련해 정부의 의도에 대해서도 논란이 오갔다. 박원철 대표는 "한반도 정세 변화에 따른 국경 문제 등은 정부가 내놓고 하기 힘들기 때문에 민간이 해야 한다"며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정부가 동북아 문제에 대한 연구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반대의 추론도 있었다. 공청회가 끝난 뒤 한 인사는 "고구려연구재단으로 국한하고 싶은 것이 정부의 뜻"이며 "설립추진위원회가 명칭을 고수하면서 그 방향으로 이끌고 갈 것"이라고 말했다. 설립추진위에 참여하고 있는 교육인적자원부의 실무자는 "정부에서 학자에게 위탁한 것일 뿐 아무런 입장이 없다"고 '의도설'을 부정했다.   

'고구려사 왜곡' 다시 왜곡하는 꼴

설립추진위원인 홍윤기 교수는 "여러 인사들이 '고구려연구재단'이라는 명칭에 대해 수차례 이의를 제기하고 있으나 설립추진위원회의 핵심인 '이너서클'에서 계속 명칭을 고집함에 따라 이런 상황에 이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공청회가 끝난 직후 설립추진 소위원회가 열렸다. 소위원회는 명칭을 그대로 고수했다. 다만 명칭 문제와 관련해 제기됐던 '한-일 문제' '정책 부문' '북방 문제'는 새롭게 연구 대상에 넣기로 했다. 

소위원회에는 역사학계 3명, 유관 분야 3명, 시민단체 2명, 사회원로 3명, 정부대표 1명, 모두 12명으로 이뤄져 있다. 이들 중 시민단체 대표인 박원철 대표와 안병우 교수, 유관 분야 대표인 서길수 교수, 3명만이 고구려연구재단이란 명칭에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구재단은 2월 18일 설립준비위 총회를 거쳐 3-1절을 맞아 발족할 예정이다.   

이날 공청회에 참여한 한 인사는 "일부 학계에서는 특정 대학 출신이 연구재단 설립을 주도하고 있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다"면서 "이렇게 되면 다른 학교 출신들이 소외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공청회 발언 중에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이면서도 한국사 연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대한 비판이 수차례 제기됐다. 한 인사는 "소수 고대사 연구가들이 연구재단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고 한다"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본질을 왜곡하면서 왜 또다시 정신문화연구원 같은 단체를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뉴스메이커 2004-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