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속의 만주] 7. 동방의 제국, 발해
경기 하남시 교산동에 선법사라는 조그만 절이 있다. 이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약수터 위에 보물 981호인 약사부처 좌상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불상 옆에는 태평 2년(977) 7월29일에 “금상황제가 만세토록 오래 사시길 기원하면서 불상을 중수했다”는 명문이 남아 있다. 여기서 금상황제란 지금 통치하고 있는 황제란 뜻으로서 중국 황제가 아닌 고려 경종을 가리킨다. 고려시대에 왕을 황제라고 불렀던 실증물이다.

고려시대는 밖으로 왕국이면서 안으로 황제의 제도를 취한 외왕내제적(外王內帝的)인 국가였다. 강력한 중국과 이웃하고 있었던 우리로서는 감히 황제국을 외부로 표방하기 어려웠다. 그랬다가는 당장 중국의 침략을 받기 때문이었다. 강대국 옆에서의 완전한 자주국가 실현은 그만큼 어렵다. 그래서 신라나 조선처럼 철저히 사대를 표방하거나, 고려처럼 내부적으로 황제라 하여 자존심을 살리면서 대외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왕국을 자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발해에도 있었다. 발해 왕이 때로 황제라고도 불린 기록이 보인다. 어쩌면 고려의 제도는 발해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를 한 번 추적해보겠다.

조선족의 고향인 중국 옌지에서 룽징(龍井)을 거쳐 도달하는 허룽(和龍)에는 발해 정효공주가 잠들어 있다. 이 공주는 757년에 태어나 792년에 36세로 사망한 발해 3대 문왕의 넷째딸이다. 길 안내판이 있지 않아서 전문가와 동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10년 전에 찾았을 때에는 작은 덤불을 헤쳐서 산에 올랐지만 지금은 무덤까지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도록 소로가 나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도로공사로 잘려나간 발해 무덤도 보인다. 또 안내문도 다른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주변을 이리저리 뒤져서야 “발해는 당조때 속말말갈인이 698~926년 기간에 우리나라 동북과 지금의 소련 연해주 지방에 세웠던 지방정권이다” 운운하는 과거의 안내판을 풀더미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오랜만에 산 위에 있는 무덤 보호건물을 다시 마주하였다. 지난번에 무덤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는데, 그 사이에 새로 세운 보호건물은 내부를 전혀 들여다볼 수 없게 밀봉되어 있었다. 여기서 1980년대 초에 발견된 12명의 인물 벽화와 묘지석은 발해의 비밀을 한껏 쏟아냈다. 특히 무덤 입구에 세워져 있던 묘지석에는 728자의 글자가 적혀 있어 발해인이 남긴 가장 긴 문장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주목해야 되는 것이 공주의 아버지를 ‘황상(皇上)’이라 부른 대목이다. 남편과 어린 딸을 먼저 보내고 수절하던 공주가 사망하자 “황상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 정침에 들어가 자지 않고 음악도 중지시켰다”고 적었다. 황상이란 황제를 일컫는 말로서 문왕을 황제로 불렀던 사실을 증언해준다.

발해에는 선조성(宣詔省)이란 관청과 조고사인(詔誥舍人)이란 관리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 언급도 없다. 여기서 연구자의 추리가 시작된다. 선조성은 ‘조칙을 펼치는 관청’이란 뜻이니 그 기능으로 보아 대통령의 명령을 총괄하는 지금의 청와대와 같은 곳이다. 그런데 왕의 명령을 조(詔)라 부른 것이 수상쩍다. 조서(詔書)는 황제의 명령이요 교서(敎書)는 왕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신년초에 발표하는 국정연설을 연두교서라 하는데 이는 왕의 명령에서 차용한

말이다. 조고사인도 명칭으로 보아서 발해 왕의 명령서를 다루는 관리가 분명한데, 조고란 것도 역시 황제의 명령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발해 왕의 명령을 교서가 아니라 조서라 불렀을 것이다. 황제의 명령인 것이다. 이처럼 고대사는 글자 하나에서 연구의 실마리가 잡히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이를 꼬투리로 삼아 발해의 국가 위상을 밝혀냈었다.

이러다 보니 771년에 일본에 보낸 발해 왕의 편지에서 자신을 천손(天孫)이라 부른 사실이 머리에 떠오른다. 천손이란 ‘하늘의 자손’이란 뜻으로서, 중국의 천자나 일본의 천황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모두 다 자신의 정통성을 하늘에서 찾는 것으로서 이 세상의 최고 지배자, 다시 말해서 황제를 가리킨다. 이 편지 때문에 일본에서는 무례하다고 하여 사신을 꾸짖기도 하였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서 천손이란 황제급에 해당하는 것이 분명하다. 몇 년 전에 함경도의 절터에서 고구려의 금동판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고구려 왕을 천손이라 부르고 있어서 발해가 고구려를 모방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던 나라였다. 거의 전기간 연호를 사용하였다. 일본에서 지금 사용하는 헤이세이(平成)가 천황의 연호에 해당한다. 이러한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은 황제의 특권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나라는 중국 황제의 연호를 받아다 썼다. 그러나 발해는 홀로 연호를 계속 사용하였다.

이렇게 정효공주 묘지의 황상에서 선조성과 조고사인, 다시 천손과 연호로 생각을 옮겨가다 보니 발해가 황제국가였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것은 발해가 독립국가가 아니라 지방세력에 불과하였다고 하면서 역사지도에서마저 발해를 지워버린 중국측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여실히 증명해준다. 발해는 바다 동쪽의 해동성국이었을 뿐 아니라 동방의 황제국이었던 것이다.

물론 발해는 대외적으로 황제국을 적극 표방하지는 못했다. 강력한 당나라가 버티고 있는 한 그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기에 정효공주 묘지에는 황상이란 표현과 함께 대왕이란 용어도 섞어 썼다. 당나라에 조공을 바쳤고 그로부터 책봉을 받기도 하였다. 황제와 왕의 제도가 혼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강대국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생존지혜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고려의 외왕내제 방식은 이렇게 발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발해는 황제국에 걸맞게 거대한 수도를 건설하였다. 둘레가 16㎞가 넘는 상경성은 이제 폐허로 변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쏘아올린 아리랑 위성에서도 뚜렷이 잡힐 정도로 그 위용을 자랑한다. 당시 당나라 장안성 다음 규모였던 동아시아 제2의 도시였다. 그 상경성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지금 지안의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는 문제 때문에 떠들썩한데, 중국은 올해 발해 수도마저 등록시키려 준비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우리 역사이면서도 고구려보다 관심을 덜 쏟고 있는 사이에 중국은 발해 궁전 자리를 하나씩 발굴하고 복원하면서 등록을 준비해왔다. 그러나 복원된 모습이 어쩐지 어설프기 짝이 없다. 남에게 잘 보이려 한 일이겠지만 추하게 화장을 한 여인네를 떠올리게 한다. 차라리 과거의 폐허가 더 정겹게 느껴진다. 그러나 남의 손에 놓여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만 일 뿐이다.

〈송기소/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경향신문 2004-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