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6년 ‘묘청의 난’ 진압


“역사에서 패배한 자에 대해 연민(憐憫)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그 시대의 거짓 신화에 파묻히고 만다.”(배링턴 무어)

‘요승(妖僧) 묘청.’

그 덧칠된 신화에 맨 먼저 칼을 들이댄 것은 단재 신채호였다. 그는 묘청의 난을 ‘조선의 역사 1000년 이래 가장 큰 사건’이라고 칭했다.

‘묘청의 난’에서 격돌한 묘청과 김부식은 북벌파(北伐派)와 사대파(事大派)를 각각 대변했다. ‘국풍(國風)의 진취사상과 한학(漢學)의 수구사상’의 한판 승부였다.

고려 인종조 왕권을 좀먹고 있던 개경의 문벌귀족과 이를 갈아엎으려는 지방 출신 신진관료들의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왕을 황제라 부르고 금나라를 치자’는 칭제건원론과 금국정벌론은 민족적 기상의 표출이었다. 고토(故土) 회복을 위한 정치적 슬로건이었다.

그러나 묘청에 대한 기록은 김부식에 의해 철저히 누락되고 왜곡된다. 중국이 사마천의 사기를 통해 춘추 전국시대를 읽었듯이, 우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통해 삼국시대를 읽어야 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묘청을 고려사 열전의 ‘반역전’에 올렸다.

김부식은 신라를 정통(正統)으로 하고, 의도적으로 고구려를 비하했다.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고 고조선과 발해의 역사를 버렸다.

태조 왕건이 그랬던 것처럼 김부식의 시야는 남쪽 삼한(三韓)의 좁은 땅에 머물렀다. 우리는 그 협애한 역사 인식에서 ‘반도(半島)사관’의 단초를 본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는 ‘대륙’을 잃었다. 그 광활한 역사를 잃었다. 고구려와 발해가 증발해 버린 자리엔 덩그러니 불국사와 석굴암만 남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단지 삼국 중의 하나가 아니다. 우리 고대사의 중심이었다. 13세기 몽골제국이 그러했듯이 고구려의 팽창은 민족혼의 영적(靈的) 폭발이었다. 고구려를 잃는 것은 우리 역사의 뿌리를 잃는 것이다.

김부식의 반도사관은 대륙에 대한 기억의 상실, 역사의식의 치매(癡태)로 이어진다.

그 역사적 망각의 골을 타고 중국은 지금 고구려 유적에 대대적인 ‘문화 테러’를 가하고 있다.

(동아일보 2004-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