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韓·中·日 ‘역사 삼국지’

최근 일본 나라(奈良)국립박물관에서 ‘칠지도’가 4년 만에 공개돼 관심을 끌었다. 일본 국보인 칠지도에는 ‘백제 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만들어 주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내세워 칠지도는 백제가 일본에 바친 ‘헌상품’이라고 주장해 왔다. 반면 국내학계는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역사적 사실의 규명은 학자들 몫이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 제국주의와 연결됐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얼마전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 소재 태왕릉의 주인공이 광개토대왕임을 입증하는 유물이 발견됐다고 해서 눈길을 모았다. 태왕릉 출토 청동방울에서 ‘신묘년 호태왕’이란 글자가 발견된 것이다. 고구려를 상징하는 광개토대왕이란 단어는 고구려의 독자성을 부정하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물려 감회를 불러 일으켰다. 이 청동방울은 또 한·일 고대사의 쟁점인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조를 상기시켰다. 일본학자들은 왜가 백제와 신라를 격파했다고 신묘년조를 자의적으로 해석,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았다.

한·중·일 3국간에 과거사를 둘러싸고 거센 파도가 출렁이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역사전쟁’이라 불리고 있다. 외신들은 한·중·일 3국에 민족주의 분위기가 고조, 역사와 영토를 둘러싼 갈등이 크게 불거지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격동의 과거사 충돌우려-

중국의 고구려사 흡수 움직임은 ‘중화(中華)주의’ 역사관의 현대적 재현이라 비난받고 있다. 일본은 근대 제국주의에 대한 뼈아픈 성찰보다 이를 미화하고 합리화하는 데 급급해 한·중 양국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올들어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 독도, 그리고 댜오위다오(釣魚島·센카쿠열도)를 둘러싼 파장은 한·중·일간의 역사인식 차이와 괴리를 보여주었다. 이같은 ‘역사전쟁’의 이면에는 고대사와 근·현대사가 도사리고 있다. 특히 1904년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한 동북아의 지난 100년은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일본의 한반도 강점, 일본의 만주점령과 중·일전쟁, 2발의 원폭투하라는 일본의 미증유의 재앙, 그리고 냉전구도 등 그야말로 소용돌이치는 격동의 역사였다. 동북아 역사상 가장 파란이 많고 상처가 컸던 시대였다. 이 과정에서 깊이 팬 불신과 감정의 골이 불러오는 인화성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한·중·일 3국은 동북아에서 함께 살아왔고, 또 싫건 좋건 함께 살아가야 할 ‘한지붕 3가족’이라 할 수 있다. 동북아의 평화와 협력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패권주의에 입각한 갈등과 반목으로 나아가느냐가 관건이다. 세계화와 지역협력, 그리고 공존이 세계적 흐름이 되고 있는 가운데 ‘역사전쟁’은 동북아의 주요한 과제다. 올들어 중국은 일본에 역사문제 협의기구 구성을 제안했다. 또 한국과 중국은 민간차원에서 고구려사 공동학술회의를 갖기로 합의했다. 한·일간, 한·중간, 중·일간 역사협의 기구가 필요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중·일 3국이 함께 참여하는 역사협의기구도 충분히 모색해 볼 만하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다. ‘과거’와 대화하는 ‘현재’의 시각이 굴절되거나 왜곡되어 있다면 큰 문제다.

과거 우리는 역사적 피해자였다. 동북아의 앞날은 평탄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힘을 키워야 한다. 정신과 물질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 문화와 국가역량을 키워야 한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의 파도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휩쓸려 갔던 우리였다. 역사의 소리를 귀담아 들으면서 좀더 넓고 멀게 국가적 비전을 세우고 매진해야 한다.

-사관·학문 역량확충 절실-

많은 사학자들은 ‘역사전쟁’은 역사를 보는 눈인 사관(史觀)과 학문적 논리의 싸움이라고 지적한다. 우리의 학문적 역량을 크게 육성해 패권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역사관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지키고 가꾸어 나가야 함은 물론이다. 지금은 문명간, 나라간 평화와 공존이 화두가 되고 있는 지구촌시대이다. 평화와 상생(相生)이라는 세계사적 소명을 토대로 지구촌에 울려퍼지는 양식(良識)과 양심의 소리로서의 역사를 말해야 한다. 지금은 우리가 역사와 새롭게 만나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경향신문 2004-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