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중심국` 선결조건

최근 독도우표 발행과 신사참배를 계기로 촉발된 한ㆍ일간 역사 분쟁에 이어,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정부의 동북공정 사업이 추진되면서 동북아 분열이 확대 재생산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중국의 중화주의와 일본의 군국주의 움직임이 더욱 가속화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자칫 미완의 역사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문제로 비화될까 자못 걱정스럽다.

세계화와 통합을 향한 변혁으로 부풀었던 새 천년 지구촌의 희망도 이미 빛이 바랜 느낌이다.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이원적 이데올로기 구조가 무너진 이후, 그 공백을 메우기도 전에 경제적 대립구도가 세계 질서를 재편하고 있다. 유로와 달러의 충돌, 원유 등 에너지 수급을 위한 긴장 고조에 이어 발발한 이라크 전쟁은 이러한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역사인식에서 야기된 한ㆍ중ㆍ일 동북아 3국의 대회전을 앞두고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중국은 러시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의 경유지로 향후 우리나라 에너지 수급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일본은 지능형 로봇, 차세대 반도체, 이동통신 등 우리 정부가 발표한 10대 차세대 신성장 동력산업의 중첩 분야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의 틈바구니를 헤쳐나갈 해법은 무엇일까.

대승적 차원에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의 범주에 전 세계를 담을 수 있는 대범함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나 기업, 개인을 막론하고 조화와 상생의 분위기를 스스로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溫故而知新'의 조화, 솔선하여 변화를 주도해 나갈 수 있는 의식전환과 이를 뒷받침할 체제의 구축이 선결사항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미 2002년 월드컵에서 모두가 하나되는 저력을 입증해 보였다. IMF 외환위기도 전 국민이 똘똘 뭉쳐 가장 먼저 극복해냈다. 문제는 한 때의 감동에 그치지 않고 계승 발전시켜 한 개인에서 국민 전체, 나아가 세계 시민으로서 변화를 꿰뚫는 혜안과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 올려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 전자업계만 하더라도 홀로 극한경쟁을 향해 치닫던 과거 아날로그식 경영에서 탈피하고 있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디지털 시대를 맞아 주변 경쟁세력과 끊임없이 제휴 및 연합을 모색하고 있다. 비단 기술과 제품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최근 디지털 컨버전스라는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기 위해 필립스ㆍ삼성ㆍHP 등 17개 글로벌 기업들이 디지털 홈워킹그룹(DHWG)을 결성한 사례는 생존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소니ㆍ도시바 등 이웃 일본의 전자업체들은 자국내 경쟁사라 하더라도 필요에 따라 자생적으로 연합관계를 맺을 만큼 결속력이 강하다. 우리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그들만의 생존법칙이다. 이들은 무한한 성장 잠재력을 담보하는 세계 표준을 선점하는데 있어 단합의 위력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총체적 밀어붙이기는 더욱 위협적이다. 지난주 발표된 산자부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수출 주력품목인 휴대폰과 디스플레이가 2010년이면 중국에 밀릴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다음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들 수 있다.

한국에 대한 인상은 `한국전쟁' `남북분단'과 같이 여전히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2년 월드컵 개최를 통해 일부 이미지 제고가 이뤄졌지만 아직까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국가브랜드의 총체적 역량은 부족한 편이다. 그나마 휴대폰ㆍ자동차ㆍ반도체ㆍ영상산업 등 개별 제품 브랜드가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견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향후 리더십을 평가하는 잣대로써 국가브랜드 제고가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지향 없는 배가 이미 좌초의 운명을 안고 있듯 명확한 목표와 리더십의 부재는 오히려 파국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내부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고 세계사에 뒤쳐진 구한말의 실수를 또다시 범해서는 안 된다. 동북아 경쟁적 협력관계의 구축을 위한 비전과 리더십의 전제조건은 우리 자신을 포함해 동북아와 세계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박제 필립스전자 사장>

(디지털타임스 2004-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