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북방고대사] <4> 동북아의 최강국
만주장악한 고구려, 중국 南朝·北朝와 4강체제

“폐하, 고려 대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오호, 슬픈 일이로다. 내 직접 문상하지는 못하나, 이곳에서라도 애도의 뜻을 표하고자 하니 동교(東郊)에 제단을 마련하고 상복을 준비하라.”

서기 494년 12월, 재위 79년 만에 세상을 뜬 고구려 장수왕의 부음을 듣고 중국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보인 반응이다. 이에 앞서 414년, 장수왕이 부친 광개토왕을 기리고자 세운 광개토왕릉비문에는 ‘영락대왕의 은택은 황천(皇天)이 민(民)을 어여삐 여김과 같이 넓고, 그 위무는 사해(四海)에 떨쳐’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해란 천하(天下), 곧 온 세상을 뜻하는 말이다.

당시 고구려는 이처럼 동북아시아의 중심 세력이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 시대에 북부여의 지방관으로 활약했던 모두루(牟頭婁)의 묘지명이 “하백의 손자이며 해와 달의 아들인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태어나셨으니, 천하사방은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것도 5세기의 고구려인이 지니고 있던 ‘우리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기원전 37년 시작된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 압록강 중류 지대를 건국의 터로 삼았던 까닭에 주변에 대한 정복과 확장을 선택하지 않으면 외부로부터의 침략과 소멸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에 ‘좌식자(坐食者·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로 불리는 강력한 전사(戰士) 집단이 존재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이 혼란에 빠진 5호16국 시대 북(北)중국에서 명멸했던 왕국들은 중원의 패권을 잡고자 황하 중류 지대로의 진출을 시도하기에 앞서 반드시 동방의 강국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다.

그게 안 되면 굴복시키려 했다.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은 요동 진출을 노리는 고구려를 의심해 이 동방의 강자와 일전(一戰)을 불사했고, 갈족( 族)이 세운 전조(前趙)는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다.

고구려는 서기 4세기 전반 중국 군현의 후신인 낙랑과 대방을 역사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만주와 한반도의 중심국가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북중국이나 남중국의 왕조들, 내륙아시아의 유목세력들은 동북아시아의 강대한 세력 고구려와 어떤 관계를 맺고 유지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국제외교를 펼쳐나가야 했다.

중국의 왕조나 내륙아시아 유목국가들에 요하 유역 일부를 포함한 동방세계 전체는 ‘고구려 세력권’이었다. 광개토왕의 20년에 걸친 사방(四方) 경략과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의 영역 다지기가 낳은 결과였다.

서기 439년 북위가 북중국 통일을 이루면서 동아시아에는 중국의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유목세계의 유연(柔然), 동방의 고구려가 상호 견제와 세력 균형을 추구하는 4강체제가 수립된다.

고구려는 내외로부터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임을 인정받게 되었고, 수도

평양은 동북아시아의 정치·사회·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미 서기 397년 백제의 아신왕은 왕성을 둘러싼 고구려군의 압박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광개토왕에게 신하로서의 충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서기 400년 신라의 요청으로 광개토왕이 내려보낸 5만의 군대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신라의 수도 금성에 주둔군을 남겼다. 망국의 위기를 벗어난 신라의 왕과 그 일행이 직접 평양에 이르러 고구려왕에게 조공을 바친 것은 물론이다.

광개토왕이 세상을 떠난 1년 뒤 그 왕릉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청동 그릇이 신라 중상급 귀족의 무덤인 경주 호우총에서 나온 것이 당시의 국제정치 상황을 증언한다.

서기 495년 만들어진 중원 고구려비에서 신라왕은 ‘동이매금(東夷寐錦)’으로 일컬어진다. ‘매금’이란 신라왕의 고유 칭호였던 ‘마립간’의 다른 표기이고, ‘동이’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신라를 보는 시각을 나타내는 용어다. 동북아시아를 하나의 세계로, 그 중심을 고구려로 상정한 고구려인의 의식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동아일보 2004-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