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역사왜곡 막기 기초연구부터

중국은 2002년부터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범국가적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둔갑시키고 있다.

고구려 활동무대였던 한반도 북부까지 중국 영토였다고 강변하는가 하면, 고조선사도 인정하지 않고 발해사를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로 편입하고 있다.

이에 따른다면 한국사는 시간적으로 2000년, 공간적으로 한반도 중부 이남으로 국한된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방치한다면 한국사의 근본 체계가 흔들리고 민족 정체성 마저 상실할 위험이 높은 것이다. 민족사와 민족 정체성의 상실은 결국 민족의 존립 마저 위협할 것이다.

더욱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조선족의 동요와 한반도의 정세 변화에 대비하고 나아가 동북아 국제질서를 중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정치적 목적 아래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동북아 중심국가를 지향하는 현 정부의 국정 지표를 뒤흔들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미래를 가로막을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응할 만한 역량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하다. 전문 연구자가 너무 적고 기초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연구기관 조차 없다.

이에 지난해 12월 9일 한국사 관련 17개 학회가 '고구려사를 비롯한 고대 동북아시아 역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연구센터 설립'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 이후 학계와 시민ㆍ사회단체의 노력으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전국민적 관심사로 부상했다.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각 부처별로 대응책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그리하여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 권고 결정을 이끌어내는 등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그렇지만 각 부처별 대응에 그친다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특히 중국은 국무원(國務院) 산하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이라는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범국가적 차원에서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을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이에 상응하는 연구기관을 설립해 중장기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 기관을 중심으로 고구려사를 비롯한 고대 동북아 사를 종합적으로 연구해 연구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이를 국민과 국제 사회에 널리 홍보해 범국민적 열망을 결집할 정(政)ㆍ학(學)ㆍ민(民)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고구려연구재단'은 이러한 필요성에 부응해 설립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만큼 연구재단은 학계를 비롯해 각계 각층이 널리 참여하는 형태로 설립되어야 한다.

또한 연구재단의 설립 목적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즉자적 대응'에 머물러서도 곤란하다. 그럴 경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한ㆍ중 간의 우호 협력관계를 공고히 다지는 데도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궁극적 지향점은 갈등의 증폭이 아니라 한ㆍ중 양국의 우호증진 나아가 인류 평화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다만 궁극적 지향점과 출발선은 정확히 구별해야 한다.

초보 마라토너가 한달음에 42.195㎞를 달릴 수 있을까. 이 먼 길을 완주하려면 기초체력부터 다져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중국에서 발간되는 각종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기관 조차 없다.

기초체력을 다질 마땅한 수단도 없는 딱한 현실인 것이다. 여기에다 전문연구자도 턱없이 부족하다. 한두 사람이 1인 3역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우수한 연구성과를 대량으로 산출하겠는가. 그러니 대중적인 읽을거리 출판이나 국제홍보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다.

중국의 패권주의적 역사관을 바로 잡고 인류 평화라는 결승점까지 도달하려면 기초체력부터 튼튼하게 다져야 한다.

먼저 중국측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기초연구를 중장기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래야 중국의 역사 왜곡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고구려사, 고조선사, 발해사 등을 풍부하게 연구할 것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 역사의 기본 줄기를 확고히 정립하고 이를 국내외에 널리 홍보해 국제사회의 협력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한ㆍ중 양국의 역사관을 비교 검토해 양국이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인식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 왜곡을 막고, 인류 평화에 기여하는 길은 저 먼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초체력을 다지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고구려연구재단은 우리의 기초체력을 다지는 데 중추적인 구실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여호규 한국외국어대 교수>

(매일경제 2004-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