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정부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포화에 이지러진/도룬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한다/…’

‘망명 정부’ 하면 언뜻 떠오르는 김광균의 시 ‘추일서정(秋日抒情)’이다. 길바닥에 나뒹구는 낙엽과 그 낙엽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진 돈. 나라를 빼앗긴 채 외국 땅 한 귀퉁이에서 더부살이하는,그래서 어쩔 수 없이 초라하고 비참한 망명 정부의 신세를 이처럼 잘 보여주는 비유도 없을 듯하다.

시에서 언급된 망명 정부는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함께 독일과 소련에 의해 폴란드가 분할 점령된 직후 1939년 9월 프랑스 파리에 세워진,자유 폴란드 최후의 법통을 잇는 정부를 말한다. 이 망명 정부는 파리와 런던을 전전하며 10만명이나 되는 군대를 조직해 41년에 폴란드를 완전히 장악한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44년 공산당으로 하여금 폴란드에서 또 다른 임시정부를 수립하도록 한 소련의 약화 공작으로 인해 해방된 조국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기는커녕 그대로 소멸됐다.

망명 정부의 이 같은 비극적 운명은 폴란드만이 아니다.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서 수립을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마찬가지. 임정은 열혈 청년들을 모아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고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무장 저항을 지휘하는 등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다했다.

그럼에도 연합국측으로부터 법통을 인정받지 못했다. 통치할 국토와 국민이 없는 임정의 국제법상 한계 때문이었다(엄밀한 의미에서 상하이 임시정부는 망명 정부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대한제국과 시간적 연속성이 없고 주체 세력이 다른 데다 이념도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

이런 망명 정부와 관련해 흥미 있는 주장이 나왔다. 중국이 최근 이른바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은,한반도가 남한을 중심으로 통일될 경우 중국 동북지방에 북한 망명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이를 우려해 벌써부터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최광식 고려대 교수의 분석.

최 교수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지난해 중국이 북한 접경지역에 15만명의 병력을 배치한 사실을 들었거니와 적어도 통일 한반도가 지금은 중국 땅이 된 조상들의 ‘고토(故土)’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 경우에 대비한 것이라는 관점보다는 현실적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중국이 남한 주도의 통일을 기정 사실로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아무래도 북한은 이 분석에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김상온 논설위원)

(국민일보 2004-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