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는 현재사다

동북아 문화공동체 논의에 관해 유럽연합 성립을 현지에서 보았던 경험으로 몇마디 거들었더니 정부와 학계, 시민단체가 추진하는 ‘고구려 연구재단’(가칭) 설립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고구려사 전문 연구자도 아닌 내가 외람되게 나선 것은, 작년 6월 중국공산당 당보인 〈광명일보〉의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을 읽은 충격이 컸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중국이 고구려사를 찬탈한다”고 파악한다. 중국은 1990년대 후반까지 역사 교과서에서 고구려사를 한국사의 줄기 안에 정확하게 놓았다. 이런 중국 중앙 정부의 태도가 연변을 드나드는 남한의 천민성 대중의 얼치기 민족주의와 민족 정통성에 소아병적으로 집착하는 북한 정권 당국의 국수주의 때문에 이렇게 무모하게 돌변한 것은 분명히 이해된다.(〈한겨레〉 2월5일치 ‘황대권 칼럼’ 참조) 그러나 우리 쪽 대중은 미숙하게 자극했지만 중국 정부는 아예 난폭하게 집어삼키려고 달려드는 것이 문제이다. 이 점에서 고구려사에만 쏠린 우리 쪽 사태 파악은 지적 안이함의 극치이다.

중국의 동북공정 세부사업 내역이나 〈광명일보〉의 ‘시론’을 자세히 뜯어보면 중국은 한국의 고구려사만 중국 ‘지방사’로 삼키거나 찬탈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이전의 한국 역사 전체를 중국 ‘속국사’로 재편하려는 논리를 저변에 깔고 들어온다. 중국은 왕조들 사이에 성립한 조공과 책봉의 봉건적 권력질서를 현대 민족국가들 사이의 주권 종속으로 해석한다. 이 논리를 따르면 한국은 청-일 전쟁의 여파로 1895년 4월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에서 비로소, 청나라로 대변되던 당시 중국의 ‘종주권’을 벗어나, ‘자주독립국’ 조선이 된다. 다시 말해 현대 이전의 우리나라 역사 전체는 마치 대만 같이 된다. 한국 쪽 고대사 연구자들의 인식처럼 단지 통일 신라 이전의 2천년 시간과 평양~원산선 이북 공간만 한국사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다. 고구려사는 한국 고대사가 아닌 현재사이다.

교육부에서 주관한 간담회와 추진위원 총회에서 압도적 다수의 인사들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고구려 문화유산 유네스코 등재로 제기된 도전에 대해 단지 ‘고구려’ 차원에서 대응하는 것에 누차 큰 우려를 표명했다. 개성 공단, 그리고 만주 또는 시베리아 철도 개설이 거의 가까워진다고 생각해도 되는 현재, 특히 중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를 상대로 남북한을 합친 우리 민족의 영토적 정체성을 분명히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엊그제는 고구려, 어제는 독도, 내일은 연해주가 문제될 수 있다. 주변 국가들과 그야말로 떳떳한 평화를 원한다면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권력 의식이 교묘하게 뒤엉킨 현재의 역사 전쟁을 ‘동북아 평화 공존권’의 시야에서 역사, 철학, 법, 경제, 문화 등의 분야를 아우르며 포괄적이고도 체계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 그 결과는 자발적으로 투신하겠다고 나선 시민들의 저력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의견이 여러 인사를 통해 강력하게 개진된 간담회와 총회를 끝낸 뒤 나오는 교육부나 소위원회 문건들은 언제나 우리의 시야를 ‘고구려’에 못박고 있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더구나 어제 공청회의 발제문에 나온 이 고구려연구재단의 사업 범위에는 영토와 역사와 관련해 제기되는 국가간 문제들에 대한 정책 개발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이유인즉 그런 정책 실무는 정부 소관 부처에서 해야 하며 재단은 순수 역사 연구에 주력한다는 것이다. 결국 중국이 고구려사 문제를 제기해 준 덕분에 조성된 국민적 공감을 편취하여 관련 전공자 몇몇만, 국민적 차원의 실천적 부담 없이 거만의 정부 지원금으로 연구재단을 세우는 꼴이 되지 않는가 하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이왕 하나 더 선심을 써 달라. 인문학에서 가장 소외되어 있는 ‘철학 연구 재단’(가칭)도 100억원을 지원해 달라. 본인이 전공한 사회철학연구재단이면 더욱 좋겠다.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

(한겨레신문 2004-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