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을 돌려다오

지린성의 송덕비를 수억원 들여 정비했던 오효정 · 오영환 형제가 중국의 때늦은 과잉보호에 경악하는 사연

고구려사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오효정·오영환 형제가 사재 수억원을 들여 2년간 정비해 놓은 중국 지린성 지안시의 광개토대왕비역. 그러나 이들 형제를 위해 공로비까지 세워준 중국 당국이 갑자기 돌변해 비역 가까이에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는데….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그때 광개토대왕은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쓰레기더미에 묻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천년고도의 역사를 간직한 충절의 도시 경남 진주에서 자그마한 건설업체를 경영하는 오효정(63) 태화건설 회장. 그는 1996년 8월 사업차 중국 동북지방을 방문하던 중 잠시 짬을 내 지린성 지안시 광개토대왕비역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충격적이었다.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안타깝고 억울했다. 고구려 역사유적지와 선조들의 영혼이 머나먼 이국 땅에서 멸시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울화통이 치밀었다.

그는 흉물처럼 방치되어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처음 접하고는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사를 넘어 민족사에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민족의 자긍심’ ‘웅대한 기상’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니던가. 하지만 중국 땅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광개토대왕비와 그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광개토대왕릉은 철저하게 버려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자라난 잡초 하나 뽑는 이가 없었고, 묘의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고 있었지만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4개의 고압선 전주마저 왕릉을 아슬아슬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환청처럼 들리던 광개토왕의 신음소리

남북한을 통틀어 민족사에서 가장 상징적 인물로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이 꼽히고 있다. 그는 ‘하늘의 아들’(천자)임을 자처하고 만주 벌판에 대제국을 건설하며 한민족의 기상을 만방에 떨쳤다. 학자들은 고구려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한몸에 지니고 있는 인물로 광개토대왕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391년 18살 나이에 즉위해 ‘영락’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했고, 이후 22년의 짧은 재위 기간 중 중국의 역대 왕조들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동방을 호령했다. 이런 광개토대왕의 위업을 기려 그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송덕비가 바로 광개토대왕비다.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위치한 높이 6.39m, 측면 폭 각각 1.35m와 2m, 무게 37t의 거대한 비석이다.

주먹을 불끈 쥔 오 회장은 우선 급한 대로 동행한 지안시 문화재 관리인에게 거금 1천달러를 손에 쥐어주고 비석 주변의 잡초도 뽑고, 보기 좋은 화초도 심어달라고 요청했다. 고구려 유적지 보전을 위한 길고도 험난한 여정의 첫걸음이 이렇게 떼어졌다. “역사의 자존심을 짓밟히고 어떻게 후손들에게 떳떳이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겠습니까?”

오 회장은 관리인에게 부탁은 하고 돌아왔으나 안심할 수 없었다. 한동안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뒤척이고 또 뒤척이면서 억지 잠을 청했지만 환청처럼 울리는 광개토대왕의 신음소리가 그를 흔들어 깨우는 듯했다. 그는 국내 조경전문가를 데리고 다시 지안으로 달려갔다. 5만달러를 투자할 테니 비역 정비를 직접 하게 해달라고 당시 힘깨나 쓰는 당 간부들에게 매달렸다. 8600여명의 한국인 관광객들이 이미 다녀갔지만 다들 아무 말 없이 스쳐 지나간 터였다.

그런데 일개 건설업자라는 사람이 나타나 비역 정비에 자신들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수만달러를 선뜻 쓰겠다고 나서다니. 뭔가 수상쩍어 보였던 모양이다. 돈은 탐이 났지만 선뜻 허가를 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작정하고 나선 오 회장을 말릴 수는 없었다. 그는 집요하게 당 간부들을 설득했다. 그들의 뒷주머니에 몰래 용돈을 찔러주고, 비역을 잘 정비하면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꼬드겼다. 마침내 1997년 9월 8개월간의 피말리는 설득 작업 끝에 허가를 받아냈다.

오 회장은 아무래도 낯선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 없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오 회장이 직접 키우다시피 한 친동생 오영환(55) 태흥건설 사장을 현장에 보내 비역 정비공사를 지휘·감독하게 했다. 동생 오 사장은 금방 일을 끝내고 돌아오리라 마음먹고 옷가지를 대충 챙겨 지안으로 향했다. 그는 그 뒤 여덟달이나 그곳에서 머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중국인 공사 인부들이 여럿 몰려왔는데 전부 끝이 뭉그러진 삽을 들고 왔더라고요. 아, 얼마나 황당해요. 또 비역 바닥을 정비하는데 자갈 하나하나를 다 손으로 땅에 박아 넣는 거예요. 장비다운 장비가 없었던 셈이죠. 거기에다 끊임없이 조금씩 뒷돈을 챙겨주지 않으면 도무지 작업 속도가 나지 않는 거예요. 거의 매일 독한 술을 먹여줘야 얘기가 통해요. 공사 허가 일을 책임지는 어떤 당 간부는 잠깐 어디 갔다 오겠다고 자리를 뜨더니 보름이 지난 뒤에 얼굴을 내밀더라고요. 중국 말은 통하지 않지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향나무를 베어버리고 소나무로

가까스로 광개토대왕비 출입문을 새것으로 바꾸고 담장을 개·보수하는 한편, 비각의 지붕과 담장의 기와를 교체했다. 비각 주변에 잔디를 심고, 광개토대왕비역에서 장수왕릉에 이르는 폭 4~5m의 2.6km 간선도로를 시멘트 콘크리트 포장으로 말끔하게 단장했다. 동생 오 사장은 “이제 끝났구나” 하고 한숨을 쉬던 참인데, 오 회장이 또 만만치 않은 지시를 했다.

민족혼을 살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소나무를 이곳에 옮겨다 심어야겠다고 말한 것이다. 1998년 5월께였다. “사실 비역 주변에 심어져 있는 향나무, 측백나무들이 거의 고사 상태에 있어 보기에도 흉했고, 너무 지저분했어요. 꼭 귀신이 나올 것 같더라고요. 중국 지방 당국자들은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우리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형님은 향나무를 다 베어버리자, 그리고 우리 고유의 민족수인 소나무를 심자고 작정한 겁니다. 그런데 그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어요. 그때의 고통스런 순간들을 구구절절이 다 얘기하면 아마 밤을 새워도 다 못 들을 겁니다.” 동생 오 사장의 회고다.

중국의 책임 있는 당국자들을 설득하는 작업도 어려웠거니와 회사 자금난까지 겹쳐 이중고를 겪었다. 때마침 국제통화기금(IMF)의 외환 위기 여파가 불어닥친 것이다. 환율이 천정부지로 뛰면서 공사 비용이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아침에 눈만 뜨면 돈이 뭉텅뭉텅 빠져나가는데 정말 환장하겠더라고요.” 오 회장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순간, 중간에 일을 그만두면 중국이 나를, 그리고 한국을 어떻게 보겠느냐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미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 개인의 신뢰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 나라 망신을 살 것 같았다. 그냥 밀어붙였다. 직접 인부를 동원해 백두산에서 자생하는 백자작나무와 적송(소나무)을 다른 곳에서 옮겨와 묘역 주변에 심기로 계획을 세웠다. 막상 작업을 시작하려니 지안시 관리들과 인부들이 또 손을 불쑥 내밀었다. 돈을 더 달라는 거였다. 소나무 비용도 분 단위로 올라갔다. “원래 소나무 한 그루당 중국 돈 60전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좋다고 일을 시작하자고 했더니 갑자기 잘못 계산했다며 다시 6원으로 올려달라고 그럽디다. 황당했지만 ‘그러자’고 하고 소나무를 차에 싣고 옮기려니까 60원을 달라는 거예요. 금방 100배가 뛴 거예요. 그래도 어떡합니까. 아버지 같은 형님의 뜻이 워낙 확고하고, 저도 빨리 이 일만 끝내면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계속 일을 추진했지요.” 동생 오 사장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고 말한다.

중국 돌변… 공로비와 소나무를 뽑다

1996년 8월에 처음 광개토대왕비를 새롭게 단장하겠다고 마음먹고 나선 이후 2년이 지나서야 비역 정비의 대장정을 마무리하게 됐다. 오씨 형제는 그때서야 광개토대왕비 앞에 서도 후손으로서 부끄럽지가 않았단다. 조금 떨어져 있는 광개토대왕릉이 여전히 방치되어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지만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지안시 당국도 오씨 형제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받았나 보다. 1998년 11월 비역 잔디에 두 형제의 이름을 선명하게 새긴 공로비를 세워준 것이다. 이어 1999년 5월에는 오 회장을 지안시 명예시장에 임명했다. 동생 오 사장은 경제고문 자리에 앉게 됐다. 두 사람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지안시를 빛낸 인물로, 명예직이긴 하나 최고위직에 오른 셈이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오 회장은 그 뒤 두세번 더 지안시를 방문했다. 그리고 또 한번 깜짝 놀라야 했다. 그 많은 돈을 들여 옮겨 심은 소나무가 뿌리째 뽑혀 없어졌고, 자신과 동생의 이름이 새겨진 공로비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당시 지안시 당 서기는 “소나무와 공로비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두겠다”고 몇 차례나 다짐했던 터라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정비 허가를 내주었던 지안시 간부들과 문화재 관리자들은 어디론가 자리를 옮겨갔고, 누구도 소나무와 공로비를 없애버린 이유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았다. 다만 중국 당국이 광개토대왕비에 쏟아부은 한국인의 물적·정신적 기여가 밴 흔적을 털어내려는 시도는 분명해 보였다.

고구려를 고대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으로 규정한 ‘동북공정’이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동북공정은 중국 동북지방의 역사, 지리, 민족문제 등을 연구하는 국가적 연구 프로젝트다. 중국 당국은 고구려사 편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2002년 2월28일 동북공정을 공식적으로 발족했다. 이 연구 프로젝트는 중국 공산당의 비준을 거쳐 중국 사회과학원과 동북3성 당 위원회의 주도 아래 앞으로 5년 동안 추진된다. 중국 당국은 연구는 물론 고구려 유적 정비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실제 중국은 지난해 4월부터 수개월간 지안 시내 고구려 유적지들을 연결하는 도로를 넓히고 포장하는가 하면, 왕궁 터를 발굴하고 고구려 역사유적 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지난해 10월1일에는 지안박물관을 새로 열고, 중앙 로비에 “고구려는 중국 동북 소수민족이고, 중국 지방정권의 하나”라는 설명문까지 버젓이 게시하고 있다. 중국은 또 광개토대왕비 등 주요 고구려 유적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는 집요한 공작을 펴고 있다. 2002년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신청했고, 올 6월 중국 쑤저우에서 열리는 제2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중국 내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멀리서 사진조차 못 찍게 해놔

중국이 거의 방치해놓았던 광개토대왕비를 새로 단장하느라 부산을 떨고, 오씨 형제의 흔적 없애기에 나선 까닭이 있었던 셈이다. 오 회장은 지난해 11월 중순 지안 광개토대왕비를 홀로 둘러보고 왔다. 그가 수년간 사재를 털어 친아버지 묘비처럼 정성껏 돌보았던 광개토대왕비는 이제 더는 가까이할 수 없는 대상이 되어 있었다. 중국 당국은 뒤늦게 광개토대왕비를 마치 국보 모시듯 소중히 다루고 있었다. 비역은 철책으로 감싸여 있는데다, 광개토대왕비는 방탄 유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사방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경비견까지 동원한 감시원이 24시간 비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멀리서나마 사진조차 못 찍게 했다. 찍다가 걸리면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하고, 카메라까지 몰수당한다. 오 회장 자신이 공식 허가를 받아 수억원을 들여 정비한 비역이었지만 관리인이 무작정 막는 바람에 철책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었다. 다만 평소 알고 지내던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사진만 몇컷 찍은 뒤 무거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뒤늦게나마 광개토대왕이 중국 당국으로부터 극진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착잡하고 겁이 덜컥 나기도 했다. 광개토대왕비를 이제 그냥 속수무책으로 빼앗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는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한 많은 귀중한 고구려 유적들이 중국 땅에 있지만, 그 혼과 역사만은 우리가 영원히 지키고 가꿔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재산은 많이 날렸지만 광개토대왕비역을 그나마 한국인의 손으로 정비한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반문했다. “만약 중국 사람들과 똑같이 광개토대왕비를 내버려뒀으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당당하게 고구려사를 우리 역사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할 말이 있지 않습니까. 최소한의 명분과 자존심을 갖게 된 셈이죠. 분명히 중국 사람들은 고구려 유적을 남의 것처럼 다뤘고 방치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게 만약 그들이 훨씬 일찍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그들의 돈으로 고구려 유적을 다 정비했을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처럼 고구려사를 우리 역사라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을까요.”

(한겨레21 2004-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