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이익의 관점으로 꿰맞추라?

90년대 초반부터 고구려사 편입 연구해온 중국… 최근 역사왜곡 작업 초고속 진행

2003년 8월 말, 중국 창춘에서 열린 ‘조선족지식인포럼’에 참가한 한 인사는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논외의 이야기’ 한마디를 하고 싶다고 했다. ‘논외의 이야기’란 바로 지금 한국과 중국 사이에 가장 뜨거운 학술·외교적 쟁점이 되고 있는 고구려사 왜곡 논쟁 문제였다. “지금 중국 역사학계의 좌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작업이 한창이다.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소 내에 설립된 ‘동북공정’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 우려할 만한 역사왜곡 작업을 접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중국에서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작업은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암암리에 진행돼왔는데, 최근 들어 아예 공식적인 국가 중점 학술사업으로까지 확대되는 걸 보면서 더 이상 이대로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학술 문제를 정치 문제화하지 말라고?

이같은 ‘논외의’ 발언을 한 조선족 인사는 얼마 전 옌볜에서 열린 중국역사학계 세미나에서 한족 학자들이 조선족 학자들을 향해 ‘고구려사의 중국 귀속 문제’에 대해 ‘국가이익의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당부했다고도 귀띔해주었다. 고구려사의 중국 귀속 문제가 한-중 양국뿐 아니라 중국과 북한 사이의 쟁점으로 불거질 것이 분명한데, 이 문제에 대해 조선족 학자들은 민족적 관점이 아니라 중국 공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이익에 복무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 조선족 인사는 “북핵 문제 등으로 중국 주변의 정세가 민감한 이 시기에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역사왜곡 작업을 시도하는 것은 그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중국은 지금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역사는 왜곡하려 해도 결코 영원히 왜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로부터 약 반년이 흐른 지금, 이 문제는 한국과 중국 사이의 가장 민감한 쟁점 중 하나로 떠올랐다. 하지만 겉으로 보면 한국쪽은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와 분노의 움직임이 봇물을 이루는 반면에, 정작 문제를 일으킨 중국의 태도는 냉정하기 그지없다. 응수라고는 “학술적인 문제를 정치 문제화하지 말라”는 한마디뿐이다.

“원래 저처럼 깊이 연구하지 않은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이전에는 고구려를 조선 역사상의 국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깊이 연구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다정(馬大正) 선생의 <중국고구려역사총론>을 읽고 난 뒤 다시금 고구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고고학적 관점이든 사료적 관점이든지 고구려 역사는 의심할 바 없는 중국 역사의 한 부분이며, 또 고구려 민족은 중국 소수민족이고 고구려 영토는 곧 중국 영토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한 인터넷 서점 독자게시판에 실린 글 중 일부분이다. 자신을 푸사범대에 근무하는 사람이라고 밝힌 이 글의 독자는 지난해 10월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펴낸 <중국고구려역사총론>을 읽은 뒤,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깊은 감사’를 보낸다고 써놓았다. 이 책의 저자 마다정은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지사연구소 연구원이자 중국의 고구려사 귀속 문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동북공정’의 연구주임이다.

고구려사 관련 역사서 속속 출간

중국 사회과학원 연구원들과 동북 3성 당위원회 선전부의 주요 지도자급 인사들로 구성돼 운영되는 ‘동북공정’은 중국사회과학원 내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직접적인 목표를 “국가의 장기적인 태평과 사회안정, 즉 국가통일과 민족단결, 변경 지역의 안정이라는 큰 목표에서 출발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관련 연구 종사자들이 견지해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로 ‘정치의식’을 강조한다. 한국에는 “학술 문제를 정치 문제화하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정치의식’을 앞세우고 연구내용 게시물에는 ‘국가이익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구호성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설립 이후부터 올 2004년 말까지 총 27개의 연구항목과 8개의 응용연구를 제1차 연구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동북공정’은 이미 1차 연구목표의 절반 이상을 완성한 상태다. 지난해 마다정 교수의 <중국고구려역사총론>을 비롯해 통화사범대 고구려사 연구가인 껑티에화 교수의 <중국고구려통사> 등 고구려사 관련 방대한 역사서들을 속속 출간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중국 지식인들이 주로 보는 당기관지 <광명일보>에 양면에 걸친 방대한 논문을 통해 공식적으로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지방 소수민족 정권”이라는 견해를 표출하면서 한국과 중국, 북한과 중국간의 학술적·외교적 쟁점으로 불거진 ‘고구려사 문제’는 1990년대 초반부터 중국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연구가 진행돼왔다. 1998년을 전후해 본격적인 ‘성과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 조선사 연구가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광명일보>에 실린 고구려사 논문도 원래 모두 3편으로 연재가 기획된 것이었으나 첫 논문이 나간 뒤 한국과 북한쪽이 격렬하게 항의하자, 언론매체를 통한 발표작업은 당분간 보류하고 있다.

중국은 1995년 7월 중국 지린성 통화사범대의 ‘고구려연구소’의 설립을 기점으로 공식적인 연구작업들을 진행해왔다. 1998년 이 대학의 ‘고구려연구소’와 지린성 사회과학연구원 고구려연구소가 함께 연 ‘제1회 전국 고구려 학술세미나’ 개최 이후 당시 국가부주석이던 후진타오를 비롯한 국가지도자들의 관심과 비준 아래 대대적인 고구려의 역사·문화 연구를 진행해왔다. 2000년 지린출판사에서 <고구려사 귀속 문제 연구>와 2002년 12월 <중국고구려사>를 펴내면서 중국 내에서는 고구려사를 공식적으로 ‘중국 역사의 일부’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지난 2천년간의 중국 정사에서는 고구려사를 조선 역사의 일부로 간주해왔다. 청나라와 중화민국, 그리고 신중국 건립 이후에도 이 관점은 변한 적이 없다. 자국 역사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북지방에 집중되어 있던 고구려 관련 유물들은 관리가 소홀시되거나 심지어 훼손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1960년대 당시 중국사회과학원 원장인 곽말약이 이러한 고구려 문화재의 유실을 안타까워하면서 현재 중국 내에 남아 있는 고구려 유물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의 유물로, 이것을 중국 지방사의 연구 소재로 활용·보존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기하면서 고구려 유물에 대한 보존론이 조금씩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당시는 단순히 문화재 보호 차원이었으나 지금은 아예 통째로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 하고 있다. 1998년 이후 편찬된 역사교과서들과 관련 역사서들에는 대부분 고구려사를 중국 지방사의 일부라고 명시하고 있다.” 중국의 조선사문제연구소에 소속된 한 연구원의 말이다.

미래의 영토분쟁에 대비한 전략

이 연구원에 따르면 1998년 중국 내에서 처음으로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로 간주하는 논문이 나왔으며, 그 이전까지의 역사서에서는 고구려사를 조선 역사의 일부로 인정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반 한-중 수교를 계기로 양국민간의 왕래가 잦아지고, 특히 한국인들이 동북지방 여행이 빈번해지면서 “만주땅은 우리땅”이라는 무의식적인 영토분쟁성 발언들이 중국 정부를 자극하게 되었다. 또 최근 북핵 문제 등으로 북한 정세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되면서 미래의 영토분쟁에 대비한 장기적인 ‘역사전략’을 준비하게 됐다. 이 연구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고구려사의 중국 귀속 작업은 명백한 역사패권주의다. 어떻게 2천년간에 걸쳐 인정되어온 역사를 하루아침에 뒤집을 수 있겠는가. 중국 내 상당수 역사학자들도 이 연구작업이 비이성적인 역사왜곡이라는 인식에 동의하고 있다. 단지 국가이익을 우선으로 내세우는 국가중점 학술사업이라는 목표 앞에서 그 목소리들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올 6월 중국과 북한에 있는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경우 고구려의 역사 문제는 더 해결하기 힘든 ‘동북아의 또 다른 역사전쟁’의 골을 깊게 만들 수 있다. “중국은 6월 쑤저우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북한과 공동으로 문화재가 등록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런 중국의 행동은 조선 문화를 빼앗으려는 것이며, 조선인들은 아마도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중국이 자신들의 역사문화유산을 빼앗아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또 조선인민들은 자신들의 중요한 (역사적) 지주를 잃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장래에 중국의 조선반도에 대한 영토 요구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홍콩의 <아주시보>가 분석한 끔찍스러운 경고다.

(한겨레21 2004-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