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覇者 역사비밀 풀어줄 ‘블랙박스’
=[韓國史속의 만주](6)고구려 고분벽화의 비밀=

668년 9월, 평양성의 문이 열리고 고구려의 왕과 대신 98인이 죄인의 모습을 한 채 밖으로 나왔다. 적국에 대한 항복 의식을 거행하기 위함이다. 70여년에 걸친 고구려의 대 수·당(隋唐)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신라와 연합한 고구려 부흥군과 당군 사이의 전투로 고구려의 옛터는 한 차례 더 고함과 말발굽 소리, 창칼이 부딪치는 빛과 소리로 뒤덮이지만 역사는 돌이켜지지 않았다. 동방의 강국 고구려는 멸망했고, 동북아시아의 정치·문화 중심 평양은 버려졌으며, 옛 수도 국내성(현재의 지안)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변경도시가 되었다. 옛 고구려의 중심도시들은 이제 서서히 역사의 기억 속으로 자신의 자리를 옮겨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06년 대한제국의 강서군수 이우영은 가까운 몇몇 사람들과 함께 삼묘리에 있는 오래된 두 기의 무덤 안에 들어갔다. 무덤 안은 넓고 서늘했으며, 벽과 천장에는 여러 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특히 큰 무덤 속 안벽에 그려진 신수(神獸)는 뱀과 거북이 얽혀서 꿈틀거리는 모습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이 느껴졌다. 유명한 고구려 강서대묘의 현무가 1,300여년 만에 대한제국의 관리에 의해 공개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3세기말이면 제작되지만 읽을 수 있는 그림을 남기기 시작하는 것은 4세기 중엽부터이다. 357년(고국원왕 27년) 제작된 안악3호분 벽화는 초기의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이자 역사의 수수께끼를 담고 있는 유적이다. 250여명에 달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회랑 대행렬도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묵서명(墨書銘)의 주인공 동수인가.

고구려의 왕인가. 고구려의 왕이라면, 미천왕인가. 고국원왕인가. 같은 시기의 중국이나 동아시아의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비교될 만한 작품을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수준의 표현기법을 구사한 벽화제작 화가들은 과연 누구인가. 고구려 사람인가. 낙랑 사람인가. 외국에서 초빙된 사람인가.

고구려의 귀족들은 지붕을 기와로 올린 커다란 고기창고를 만들어 유지하고, 우차(牛車)를 두 대 이상 운영할 정도로 잘 살았는가. 아니면 이런 시설이나 기구는 왕과 왕실의 사람들에게만 허용되었는가. 고구려의 귀족이나 상류층 여자들은 정말 벽화의 인물들처럼 턱이 겹칠 정도로 살쪄 있었는가. 아니면 살찐 얼굴이 화가에 의한 의도적 표현의 결과일 뿐인가.

1976년 관개수로 공사 도중 발견된 덕흥리 고분의 벽화는 고구려 사회 및 문화에 대한 생생한 실증자료를 더하여 주는 동시에 고구려사에 대한 새로운 논쟁거리를 던져주었다.

408년(광개토왕 18년) 만들어진 벽화고분의 주인공이 유주자사를 지냈던 진(鎭)이라는 사람임은 묘지명을 통해 확인됐지만, 진이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유주자사’ 재임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 고구려의 관리로서 유주자사를 지냈다는 것인지,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고구려와 경쟁관계에 있던 전연(前燕)과 같은 나라의 유주자사를 지냈던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요동지역 대부분과 하북 평원 일부를 포함한 땅 유주의 자사였다고 하는 ‘진’은 처음부터 고구려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광개토왕 시대 고구려로 망명온 전연의 장군이었는가.

두 벽화고분 주인공의 정체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안악3호분 벽화보다 50년 늦게 그려진 덕흥리고분 벽화에서 등장인물들은 얼굴과 복식에서 고구려적인 특색을 보다 강하고 뚜렷하게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행렬도에 등장하는 기사들은 말과 무사 모두 갑옷과 투구로 무장했다고 전하는 고구려 철기(鐵騎)를 연상시키며, 귀부인의 우차 곁에 늘어선 갸름한 얼굴의 시녀들은 하나같이 주름치마를 걸쳤다. 덕흥리고분 벽화보다 늦은 시기에 제작되는 쌍영총 및 수산리고분벽화 등장인물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전형적인 고구려인의 얼굴과 복식이 덕흥리고분벽화에서 이미 준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초기 고분벽화가 생활풍속을 주제로 삼았음은 평양권을 대표하는 안악3호분, 덕흥리 벽화분뿐 아니라 씨름무덤(각저총)을 비롯한 지안권 고분벽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고구려인 특유의 점무늬 저고리와 바지, 주름치마를 걸친 갸름한 얼굴, 소박한 머리모양의 인물들이 씨름무덤 벽화에 모습을 보인다. 내세에도 현세처럼 귀족의 권위와 여유를 지니고 살고자 했던 고구려 귀족의 모습을 지안 고분벽화의 주인공 초상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5세기 고구려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이 씨름무덤 곁에 만들어진 춤무덤(무용총)의 무덤주인은 정면을 향한 초상으로 그려지지 않고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 승려의 설법을 듣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무덤 방의 천장고임은 하늘세계로 떠오르는 연꽃으로 채워지고, 신선들조차 연꽃줄기를 붙잡고 하늘을 날아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연꽃만으로 장식된 벽화고분들이 옛 수도 국내성의 평야지대와 산기슭에 잇달아 만들어진다.

서방의 중국왕조들, 북조, 남조로 불리던 나라들에서는 제작되지 않는 독특한 주제의 고분벽화가 고구려에서는 연꽃을 통해 정토에서 태어나 새 삶을 누리고자 하던 고구려 귀족들에 의해 한 시대를 풍미하는 사조가 된다. 어느 사이에 중국왕조들의 것과는 구별되는 고구려적 유형의 고분벽화가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 고구려에서 성립한 것이다. 새로운 문화요소에 대한 자유로우면서도 선택적인 수용, 소화, 고구려적인 형태와 내용을 지닌 문화요소로의 재창조라는 ‘고구려식 문화소화법’이 고분벽화라는 외래의 장의미술 장르에 적용되었고 눈에 뜨일 만한 성과를 거두기에 이른 셈이다.

5세기 후반의 늦은 시기, 장수왕 시대의 말년에 이르면서 고구려 고분벽화는 사신(四神)의 시대로 접어든다. 생활풍속도, 연꽃장식도 더 이상 주제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만이 벽화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되는 새로운 흐름이 고분벽화의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역시 중국의 남북조나 수·당 고분벽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별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 깊은 허공을 내닫는 청룡과 백호, 우주질서의 조화와 회복을 꿈꾸며 양기(陽氣)와 음기(陰氣)의 합일을 시도하는 현무, 새로운 우주의 출현을 반기는 듯이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려는 순간의 암수 한 쌍 주작이 무덤 방 네 벽을 지키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사신도 고분벽화가 대동강이 바라다 보이는 산자락 끝 곳곳의 무덤 방안에서 그려지게 된 것이다.

대한제국 말 강서군수 이우영의 일행이 본 것은 동아시아 안에서도 동북아시아를 독자의 세계, 고구려 중심의 개별 문화권으로 인정받게 만들었던 힘의 바탕이자, 힘 그 자체였다.

〈전호태/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경향신문 2004-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