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해 본 수도 이전

천도의 주 목적은 왕권강화

역사적으로 천도의 배경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가장 흔한 천도 이유는 왕권의 강화였다. 왕권에 도전하는 귀족 세력이 지나치게 성장했다고 판단될 때 수도를 옮겨버림으로써 귀족 세력의 자산 가치를 폭락시키고, 근거지를 없애버리는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천도는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줄곧 있어온 천도의 역사와 이유를 되돌아봄으로써 역사를 현실의 거울로 삼아보기로 한다. 현실 정치 과제의 대부분은 반드시 역사 속에 그 답이 있다.

삼국시대 이래 계속 남하 추세

고구려의 경우 맨 먼저 도읍했던 졸본성은 북방 기마민족의 터전이다. 현재 중국의 랴오닝(遼寧)성에 속하는 졸본성은 여름철 기온은 한반도와 다름없고, 일조 시간은 오히려 더 길다. 겨울이 길기는 하나 농사 짓는 데 별 지장이 없고, 특히 목축을 하는 데는 아주 좋은 지역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동몽골, 러시아 연해주 일대, 남만주 등을 장악할 수 있고, 요동벌까지 진출이 가능하다. 이곳은 원래 수많은 대륙 국가를 탄생시킨 명당이기도 하다. 여기서 금(金) 나라가 일어났고, 선비족이 일어나 한 시대를 풍미했다. 칭기즈칸이 세계 정복자가 된 배경에도 북부여의 동몽골 땅이 큰 힘이 되었다.

그러다가 고구려는 서기 3년 훨씬 남쪽 지방이자 압록강을 끼고 있는 국내성으로 천도했고, 여기서 425년 간 머물렀다. 국내성은 꽤 오랜 기간 고구려의 수도로서 위용을 자랑했다. 압록강변의 풍부한 물산과 선비족 같은 북방 기마민족의 공격선에서 멀찍이 떨어졌다는 점, 랴오허(遼河)를 다스리기 유리하고, 한반도를 넘보기 좋은 자리라는 점 등이 장점으로 작용한 듯하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곳에서 서쪽인 선양(瀋陽)이나 베이징(北京) 등으로 진출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한반도의 중심에 속하는 땅 평양을 바라보았다. 한강 유역이 탐나서 그랬던 모양이다. 서기 427년 장수왕은 남진 정책의 일환으로 국내성을 떠나 평양성으로 천도하는데, 귀족 세력 숙청 등 나름대로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지만, 이것은 고구려가 북방 대륙 국가에서 반도 농경 국가로 스스로 체위(體位)를 낮추는 결과를 불러왔다.

역사에 만일이란 있을 수 없지만, 고구려가 광개토대왕 시절 선양 근처로 천도를 했더라면 삼국시대 이후 수많은 왕조가 부침하던 중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도 있고, 이 혼란을 종식시킨 송(宋) 나라를 대신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백제는 고구려에 쫓겨 도읍 옮겨

위기를 피해 도망다니는 천도의 예는 백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제의 경우에는 건국 시기부터 고구려에 쫓겨내려온 것인데, 그나마도 고구려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 또 다시 공주의 웅진성으로 쫓기다시피 천도했다. 천도 직전, 백제의 수도 한성(서울)은 고구려군에 점령당하고 심지어 개로왕까지 피살됐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긴 지 50여년 만인 서기 475년의 일이다.

그 뒤 100년도 안된 538년에 백제 성왕은 웅진성에서 다시 사비성으로 천도를 한다. 이때는 한강 유역을 일부 수복했을 무렵이고, 일본이나 중국 대륙의 나라들과 해상 교류를 하기 좋은 부여의 사비성으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단견이었다.

북방의 위험을 방치하거나 피한 채 남방을 아무리 많이 장악한들 그 말로(末路)는 뻔할 수밖에 없다. 백제는 이후 신라와 나제 동맹을 맺는다든지 외교적인 수단으로 고구려에 대항하지만,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눌려 힘을 쓰지 못하던 신라가 오직 살아남기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도리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일부러 위기를 잊으려 하거나 피하는 것은, 적어도 국가를 경영하는 차원에서는 금기 사항이다.

영광ㆍ굴욕 겪은 천년의 수도 경주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신라의 경우는 건국 이후 경주 한 자리에 수도를 정한,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나라다. 그것이 신라를 지방 국가로 축소시킨 원인이기도 하다.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 치우친 지방 정권에서 벗어나 좀더 발전적인 계획을 세운 적이 한 차례 있었다. 시기적으로 가장 좋은 삼국통일 후였다. 통일 전쟁에 앞장섰던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즉위 9년째인 689년 대구로 수도를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아마도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세력이나 그간의 진골 등 귀족 세력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강력한 왕조를 세우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천도에 실패했다.

천년 왕도에 걸맞은 진골 등의 수구 세력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고, 이들은 신문왕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결과 통일신라는 935년 멸망할 때까지 수많은 내분에 휩싸여 대륙 진출은커녕 내부 안정조차 이루지 못했다. 통일 무렵 과감히 천도를 하고 왕조를 다시 세웠더라면 신라의 역사는 달라졌을 테지만, 그 뒤의 신라는 사실상 경주 일대나 지배하는 토호 세력 집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천도를 거듭한 발해

고구려가 멸망한 뒤 그 유민들이 재건해낸 발해는 건국 초기 네 차례나 천도를 했다. 그만큼 정정(政情)이 불안했다는 뜻이다.

698년 고구려 부흥 세력들은 동모산에 처음 근거지를 틀었고, 약 40여년 만인 740년에는 서고성으로 천도를 하는데, 이때는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기 때문에 수도다운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옮긴 듯하다.

그러다가 불과 15년 만인 755년 흑룡강 유역의 상경성으로 북진(北進)해 서울을 삼았고, 그로부터 30년 만인 785년에는 팔련성(혼춘)으로 가 8년여 머물다가 793년에 다시 상경성으로 돌아갔다. 926년 멸망할 때까지 그곳을 서울로 삼았으니 상경성이 수도로서는 가장 명이 길었던 셈이다.

하지만 발해는 동북 지방에 치우쳐 있어 중국의 급변하는 정세에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그랬기 때문에 신흥세력으로 일어난 거란에 어이없이 멸망당했던 것이다. 발해가 멸망한 배경으로 화산 폭발이나 대기근 등의 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방어 개념으로만 수도를 정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발해는 고구려가 그랬던 것처럼 랴오허 지방을 소홀히 다루었고, 그 결과 그 땅에서 같은 북방 민족인 소수민족 거란이 발흥하여 도리어 뒤통수를 맞았던 것이다. 거란족은 발해가 결심하기만 했다면 얼마든지 미리 제압할 수 있던 작은 민족이었다. 그러나 변방 국가를 자처한 발해로서는 중원의 흐름을 보지 못했고, 그 틈을 타 거란이 일어나는 국제 정세를 민감하게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발해는 선양이나, 그도 아니라면 국내성 정도의 위치로 천도를 했어야 고구려의 진정한 계승자로 자임할 수 있었으나 끝내 그러질 못했다. 오죽하면 고려에 쳐들어온 거란이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천도 실패 뒤 무너진 고려 왕조

개경은 경주나 웅진, 사비에 비해 대륙 국가의 부침에 비교적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역이기는 하지만, 대륙으로 웅비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그러다보니 거란과 여진, 몽골의 연이은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묘청이 평양성으로 천도를 주장하고 나선 것은 매우 획기적 사건이었다. 왕의 묵인으로 묘청은 평양 천도를 추진했고, 이들 천도파는 고려 국왕은 황제이며 연호를 써야 하고, 금나라를 상국으로 모실 게 아니라 정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개경을 장악한 문신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천도를 막았고, 천도파는 평양에 궁성을 짓고 천도를 계속 추진하다가 1135년 김부식 등의 개경파에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무신들이 장악한 고려 조정은 이후 몽골군의 침략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강화도로 천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전쟁을 해야 할 무신들이 조정에서 문신들의 업무까지 장악하다보니 문약(文弱)만큼이나 무약(武弱)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무인의 기상을 잃어버린 이 유사(類似) 무인 정권은 침략자와 싸워 이기는 길을 버리고 피해서 보신하는 길을 선택했다.

몽골군이 물을 싫어하고, 배 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군부 세력은 수전(水戰)으로 맞서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 아니라 바다를 사이에 둔 강화도로 피신할 생각이나 한 것이다. 말이 좋아 천도지 강화 천도는 군부 세력들이 자신들만의 안녕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피란에 불과했다.

강화도 천도는 강화도만은 안전할지라도 그 나머지 국토는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고스란히 짓밟히도록 포기하는, 마치 부도를 낸 회사를 청산하듯이 사주가 손을 빼는 꼴이 되고 말았다. 몽골군은 주인없는 고려 전역을 마음껏 유린하고 다녔고, 수많은 문화유적이 파괴되고 불에 타고, 백성들은 죽거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다. 그 사이에도 강화도에서는 전쟁터에 나가 있어야 할 군부 귀족들이 사치스럽게, 여유있게 살았다.

고려는 몽골군을 전쟁으로 극복한 것이 아니라 군부가 조종하는 태자를 쿠빌라이에게 보내 가까스로 강화를 맺고, 이후 속국을 자처했기 때문에 겨우 불에 타버린 도읍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뒤 우왕과 공민왕대에 각각 한 차례씩 한양으로 천도를 시도했지만, 워낙 왕권이 미약할 때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양 시대를 연 태종 이방원

고려의 무능한 왕권을 바로잡은 사람이 이성계다. 이성계는 고려시대를 이어온 무인 정권의 마지막 실력자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경대승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임연으로 승계되다가 몽골군의 개입으로 무인 정권이 종식되고 왕권이 살아났다. 하지만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쇠약해질 무렵 재차 등장한 군부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무인 정권으로 등장했고, 이성계는 최씨 무인 정권처럼 따로 왕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왕을 칭했다.

그는 귀족 및 수구 세력들을 제거하고, 친위세력을 새로 형성하기 위해 즉위 후 2년 만인 1394년 과감히 개경을 버리고 한양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왕자의 난 등 불길한 사건이 연거푸 터지자 정종은 개경으로 환도했고,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태종 이방원은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했다. 고려 시절부터 따지자면 네 번째 천도 시도였고, 비로소 한양은 국도(國都)로 자리잡았다.

아버지 이성계도 뜻을 이루지 못한 한양 천도를 힘으로 밀어붙인 태종은 왕권을 확실히 장악했고, 이를 바탕으로 세종조의 화려한 문치를 이뤄낼 수 있었다.

다만 고구려계가 한국인의 주류라고 가정할 때, 국도(國都)가 만주대륙에서 압록강변으로, 평양으로, 개경으로, 한양으로 줄곧 남하하기만 한 것은 우리 역사가 대체적으로 세계적인 안목을 갖지 못한 지역사로 머무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충청도로 또 천도한다니,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밀려 서울에서 쫓기다시피 충청도로 떠밀려 내려간 백제가 자꾸만 떠오른다. 표 계산하다 흐지부지될지라도 당장은 걱정이다.

<이재운 소설가>

(주간조선 20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