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미스터리] (33) ‘개발’미명에 파괴된 구의동유적
‘한강을 확보하라.’ 예로부터 한강은 번영의 상징이 틀림없다. 한성백제(BC 18~AD 475년)의 굳건한 500년 도읍지가 바로 한강이었다. 고구려는 백제의 한강을 빼앗으며(475~551년) 최절정기를 이뤘다. 그러나 고구려·백제로부터 한강을 확보한 신라(553년)는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

지금도 2,000년의 역사를 넉넉한 품으로 가득 담고 묵묵히 흐르는 한강. 한성백제의 수도인 풍납토성과 강건너 아차산, 그리고 지금은 아파트 숲으로 변해버린 구의동은 5~6세기대 한강을 둘러싼 그 피비린내나는 3국 전쟁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 “스승의 말씀을 거스를 수 없다”=그로부터 1,500년이 지난 1977년 7월. 야트막한(해발 53m) 구릉인 구의동 유적 현장설명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유적은 이른바 화양택지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벌어진 구제발굴이었다.

“이 유적은 빈전(殯殿)일 가능성이 커요. 중심에 관을 넣고 목조가옥을 세우고 출입시설까지 만든 임시 영혼의 생가. 백제 무령왕과 왕비가 죽은 뒤 3년상을 치른 예가 있잖아요.” 발굴단장인 삼불 김원룡 선생의 ‘말씀’이었다. 이 유구 역시 가묘(假廟) 기능을 수행하다가 3년 뒤 이 가건물을 전부 불사르고 그 위에 봉분을 만든 것이라는 노학자의 결론이었다. 말하자면 ‘한성백제고분’이라는 것이었다. 조사원들은 “군사시설일 가능성도 있다”는 의견을 개진했으나 하늘같은 스승의 견해에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왜 혼란이 생겼을까. 애초부터 구릉의 정상에 있는 이 유적이 백제왕릉일 것이라는 선입관이 워낙 강했다. 또한 호석의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 삼국시대 석축이 빙 둘러쌓였고, 분명한 봉토를 형성했으며 중심부에 2중의 광(壙)이 있다는 점 등등.

과연 그럴까. 위치가 구릉 정상부라면 도리어 군사요새일 가능성이 크고, 외부 석축부도 호석(護石)의 기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방어시설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축석부의 돌을 굴려 적을 살상하기 위한….

이밖에도 생활공간(원형수혈) 내부에 조성된 온돌시설 또한 특이한 유구였다. 이는 몽촌토성에서도 같은 형식의 온돌이 확인된 바 있다. 결국 실제생활이 이뤄진 주거유적이라는 뜻. 동시에 확인된 1,353점의 철제무기류는 이곳이 군사요새의 성격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 “그렇다면 너희들이 맞다”=하지만 누구도 고고학계 어른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했다. 윤대인(현 강동성심병원 이사장)·윤덕향(현 전북대 교수) 등 현장의 젊은 연구자들은 고민에 휩싸였다. 그들은 그해에 펴낸 약보고서의 초고를 삼불선생에게 보여드리며 “군사유적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삼불은 다행히 후학들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잠정적으로는 백제고분이라고 하고 군사유적일 가능성도 있다는 식으로 약보고서를 작성하지….”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88년 겨울, 서울대 박물관에서 백제 몽촌토성 발굴토기를 복원하던 최종택(당시 박물관 미술사)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달간의 복원과정에서 아주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 ‘나팔잎항아리(廣口長頸四耳甕)’가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선생님, 분명 고구려 토기인 것 같습니다.”

89년 2월, 발굴유물 전시회가 열리던 서울대박물관. 최종택(현 고려대 교수)과 박순발 조교(현 충남대 교수)는 스승(삼불 김원룡 선생)에게 운을 뗐다. 스승의 꾸지람을 듣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스승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렇게 연구했다면 자네들이 맞을 거다.”

의미심장한 순간이었다. 이 몽촌토성 토기의 재평가는 자칫 영원히 ‘백제고분’으로 치부될 뻔했던 강건너 ‘구의동 유적’이 고구려 남하정책의 전초기지임을 확인해주는 망외의 성과를 끌어냈으니까. 최종택은 이 몽촌토성의 ‘고구려 토기’와 77년 백제고분으로 추정됐던 구의동 출토 토기가 아주 비슷하다는 점을 간파했다.

최종택은 구의동에서 확인된 온돌이 중국 지안(集安)의 동대자 고구려 건물지에서 나온 온돌과 유사하다는 점도 알았다. 유구의 규모·형태, 유물의 양상이 인근 아차산, 용마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성 유적과 같다는 점에 더욱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는 구의동 유물을 다시 검토한 끝에 이 철기들이 고구려 사람들이 제작·사용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백제고분으로 평가되던 구의동 유적은 결국 고구려의 최전방 군사유적으로 확정된 것이다.

이제 고구려의 최전방 초소가 축조됐던 무렵의 고구려·백제의 패권다툼을 살펴보자. 고구려와 백제는 4~6세기 무려 37회의 접전을 벌인다. 최초의 전쟁은 369년인 고구려 고국원왕 39년, 백제 근초고왕 24년대인 치양(백천)접전이었다. 초기에는 백제의 우세였다. 백제는 근초고왕이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는 등 4세기 후반까지는 5승1패(10회 전투중 4회는 승패 불명)의 압승지세를 보였다.

◇ 한강변의 고구려 최전방 초소=하지만 광개토대왕대에 들어 양상이 바뀐다. 중국 전연(前燕)과의 교전 때문에 백제와의 전쟁에 신경을 쓰지 못했던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즉위 392년)부터 백제를 압박한다. 392년부터 백제의 수도 한성이 함락될 때까지 11번의 싸움에서 7승(4번은 승패불명)을 거둔다. 광개토대왕 6년(396년)에는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의 국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백제왕(아신왕)이… 무릎을 꿇어 영원히 노객(奴客)이 될 것을 다짐했다”(광개토대왕 비문)는 명문이 있을 정도. 전세가 완전히 고구려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를 압박하던 북쪽의 후연과 남쪽의 백제 중 남쪽인 백제를 누란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AD 400년 무렵부터는 다시 북쪽으로 고개를 돌려 후연을 괴멸시켰다. AD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함으로써 만주정복을 완성했다.

413년 부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장수왕은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뒤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폈다. 장수왕에게 선대 고국원왕을 죽인 백제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였다. 승려 도림을 첩자로 보내 백제의 국고와 민력을 소모시킨 뒤 끝내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다.

고구려 최전방 초소인 구의동 유적은 비록 아주 작은 규모지만 광개토대왕·장수왕대 고구려 최전성기의 국력을 상징하는 귀중한 유적이었던 것이다. 지금 중국의 역사왜곡 문제가 불거진 이때, 구의동 유적을 70년대 개발의 미명 아래 마구 파괴시킨 과거사가 쓰리도록 아프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구의동 유적이요? 지금 보이는 구의동 한양아파트 24층, 바로 그곳에 있었어요.” 최종택 교수의 말이다.

〈조유전/고고학자〉

  (경향신문 20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