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하는 동북아 역사] (上)삼국갈등 왜 일어나나

최근 한·중·일 동북아 삼국 간에 역사인식과 영토를 둘러싼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일본의 일부 인사들에 의한 역사 교과서 왜곡사건이나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망언의 대부로 불리는 이시하라 도쿄 도지사의 “한일합방은 조선인의 총의로 일본을 선택한 것”이라든가, 중국의 유인우주선 발사에 대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발언 등 한·중·일 간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영토문제를 둘러싼 한·중·일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역사인식 및 영토문제로 촉발된 한·중·일의 갈등은 삼국의 민족주의의 대립이라는 차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독도 우표 발행으로 한·일 간의 영유권 분쟁이 재연되고 있는가 하면, 대만과 일본 오키나와사이의 무인도인 댜오위타이(일본명 센카쿠열도)부근 해역에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중국 선박을 물대포로 공격한 사건이 발생해 중·일간의 영유권 분쟁이 격화되고 있다. 또 한·중간에는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중국 정부의 역사 프로젝트인 ‘동북공정’ 사업이 알려지면서 한·중간 정부간 분쟁으로 비화될 조짐조차 보이고 있다. 한·중·일 삼국 간에 역사전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왜 민족주의인가

세계화와 지역통합의 물결 속에서 맞이한 21세기에 왜 한·중·일 삼국은 역사인식과 영토분쟁이라는 지극히 전근대적 분쟁에 휘말리며 민족주의적 대립을 노정하고 있는가? 첫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의 기본 틀을 형성해 온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로 규정되는 미소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라는 거대 담론이 소멸되었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담론이 지역의 지배적 담론으로 정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계화와 지역통합, 협력과 공존이라는 21세기적 주제는 아직은 동북아 지역의 지배 담론으로 정착되지 않았고, 이러한 지배적 담론의 부재는 역내 국가들의 국익우선이라는 민족주의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동북아 지역에서의 미국의 상대적 후퇴와 이에 기인하는 일본의 역할 증대가 지역의 주도권을 둘러싼 중·일의 국가적 대립을 강화시켰고, 중국 또한 경제성장에 따르는 탈사회주의의 경향 속에서 사회주의를 대체할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민족주의와 ‘대중화주의’를 강화하고 있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중·일 양국이 동북아 지역의 중심국가로 대두되면서 양국간 관계에서 협력과 공존이라는 가치보다 대립과 갈등을 동반하는 국익중심의 가치가 우선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셋째로 한·중·일 삼국의 국내구조와 가치체계가 다원화되면서 다양한 시민사회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국내적 변화와 시민사회에 의한 문제제기가 2국간관계 및 국제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든가, 중국의 인터넷 동호회인 ‘애국자동맹망’에 의한 신칸센 거부 청원운동, 독도 우표 발행을 계기로 조직된 한국 네티즌 그룹들의 활동 등은 한·중·일 삼국의 시민사회가 배타적 민족주의의 중요한 주체가 되어 있음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인터넷의 발달은 네티즌 주도의 민족주의 고양의 중심 수단이 되고 있으며, 최근의 한·중·일 삼국의 네티즌 간의 격돌은 ‘사이버 삼국지’로 불릴 정도로 활성화 되어 있다.

일본의 군사적 보통국가화와 한·중·일 관계

이와 같은 한·중·일의 민족주의적 대립과 역사전쟁의 중심에 일본이 있다. 지난 1990년의 걸프전 이래 일본은 군사력 증강과 군사적 역할 확대로 대변되는 군사적 보통국가화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이러한 일본의 재무장 움직임은 전쟁 포기와 전력보유 금지를 규정한 헌법 제9조의 개정으로 완성될 전망이다. 특히 9.11 테러 이후 일본은 미일동맹을 강화하면서 적극적인 군사적 개입의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일본의 전후청산이 불완전하다고 주장하는 한·중 양국에게 일본의 재무장 및 군사적 역할 확대는 지역 불안정화의 원인이며, 양국 정부의 대일 적대감 표출의 주요한 원인 역시 이러한 대일 불신에 기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북아 지역에서의 자유무역협정(FTA)의 체결을 둘러싼 중·일의 각축 역시 한·미·일 공조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일본과 지역의 중심 국가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중국과의 대결구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전후처리 및 역사인식 문제에 있어서는 변화하지 않고 있는 일본, 그러나 ‘전쟁을 할 수 없는 국가’에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변화하고 있는 일본이 동북아지역 문제의 중심에 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지역구도 속에서 민족주의적 대립을 완화하고 지역의 평화공존과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한·중·일 관계는 어떠한 형태로 발전되어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동북아 삼국에게 던져진 가장 큰 과제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쟁과 평화라는 20세기적 담론을 극복하고, 세계화와 지역통합, 협력과 공존이라는 21세기의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 지역의 관계국들이 협력해야 할 것이다.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진행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중·일의 협력과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 한·중·일 삼국은 국익 우선이라는 미시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지역질서를 열어갈 21세기 지역 담론에 대해 논의해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전진호 / 광운대 일본학과)

(국민일보 20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