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土를 넓힌’사나이
발해 해상항로 학술탐사대 ‘발해 1300호’. 1997년 12월3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옛 발해의 뱃길을 따라 제주 성산포로 향하던 뗏목. 25일 뒤 뗏목은 일본 오키제도 도고섬에서 전복된 채 발견됐다. 거친 뱃길을 헤쳐온 네 젊은이의 이름은 장철수, 이덕영, 이용호, 임현규. 높은 돛대 끝에 영혼을 매어두고, 그들은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했다.

‘발해 1300호’ 뗏목은 옛 발해와 한반도, 일본을 잇는 해상항로 복원을 통해 독도, 만주, 연해주까지 아우르는 우리 영토에 대한 인식을 넓히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간도와 연해주는 고조선을 잉태한 우리 민족의 발상지였고, 고구려와 발해의 주활동영역으로 역사 속에서 검증된 우리 민족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31일 광화문에서는 ‘발해 1300호’ 탐사대원들을 기리는 6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최근들어 일본과 중국은 독도 망언과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로 영토(領土) 싸움을 걸어오고 있다. 우리 시대 ‘영토’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겨울 바다의 외로운 혼이 된 ‘발해 1300호’의 발자취를 좇아봤다. /편집자

“난 마누라가 둘이야. 동도와 서도. 독도와 결혼했거든.”

발해 뗏목탐사대 대장 장철수. 독도와 결혼했고, 국토를 사랑했던 사나이. 온몸으로 발해 해상 항로를 증명했던 그는 이제 세상에 없다. 당시 나이 38세. 그의 육신은 옹기장이 어머니의 등에 업혀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던 고향 통영의 미륵산 자락에 묻혀 있다.

장대장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8년. ‘울릉도 주민들이 뗏목을 타고 독도로 자주 건너갔다’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증명하면서부터다. 3일간 뗏목에 몸을 싣고 그는 울릉도와 독도 사이 92㎞의 바닷길을 건넜다. 일본이 17세기부터 독도와 왕래했다고 주장하는 데 맞서, 예전부터 독도가 우리 삶의 터전이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그는 그때 이미 2차례 독도탐사를 끝냈고, 한 해 전에는 1차 울릉도~독도 뗏목탐사를 시도했다.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 81학번인 장대장이 ‘독도문제 연구회’를 만든 것은 86년. 첫 대학생 독도 동아리였다. 그는 수업 도중 본 세계지도 10장 가운데 8장이 모두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것에 충격을 받고 “구겨진 역사를 바로 펴겠다”고 결심했다. 2학년 때인 85년에는 ‘한일 합방 연구’로 외대 학술상을 받기도 했다.

그로부터 10년, 그는 모든 것을 잊고 독도에 몰두했다. 울릉도, 서울역, 경남 통영, 경북 안동 등 전국 각지에서 직접 모은 자료로 독도자료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가 있을 때면 직접 찍은 독도 사진을 크게 확대해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독도에서 일본망언 타파굿, 독도의용수비대 위령제를 올리고, 통영과 창원에서 해상정책 세미나를 열었다. 해마다 식목일에는 독도에 나무를 심었고, 독일의 윤이상 선생에게 “평화음악제를 독도에서 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독도는 우리 땅의 온전한 모습을 회복하게 하는 민족의 혈”이라며 “분단된 이 땅에서 독도를 남북 동포의 힘으로 지켜낼 때 일본이 넘겨준 만주를 중국에서 되찾고, 대마도와 오키나와까지 우리의 힘으로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관련기사 M2·M3·M4

97년 5월 장대장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대학을 찾아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주 성산포까지 1,244㎞의 바닷길을 탐사하겠다고 했다. 극동대 부총장은 “작은 나라에서 온 작은 사람이 그렇게 큰 뜻을 품었다는 데 놀랐다”며 도움을 약속했다. ‘푸른 독도 가꾸기’ 활동으로 알게 된 울릉도의 이덕영 선장, 국제 요트대회로 알게 된 창원의 그래픽 디자이너 이용호씨, 부산 한국해양대 후배인 임현규씨가 대원으로 합류했다.

그는 이미 2년 전부터 발해 해상항로 탐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해양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해 해사법을 공부했고, 21세기 바다연구소를 만들어 해양정책을 연구했다. 고향친구인 강영욱씨는 “철수는 우리가 동아시아를 호령한 대제국 고구려, 발해의 후손임을 당당히 주장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고 전했다. 뗏목 탐사를 위해 러시아로 들어간 그의 품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서가 들려 있었다.

발해 해상항로 뗏목 대탐사에 들인 예산은 4천1백50만원. 대원들이 1천만원을 만들고 지인들이 10만원, 20만원씩 보탰지만 턱없이 모자랐다. 장대장은 결국 자신이 살던 집을 팔아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교민과 현지 한국 기업들이 볼트와 너트, 주스 10상자, 일꾼 등 십시일반으로 지원을 했다. 직접 못을 박아 뗏목을 만들던 장대장은 오른손 새끼손가락과 넷째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출항할 때까지도 그의 오른손에는 깁스가 감겨 있었다.

뗏목이 좌초한 뒤 보름 이상 수색했지만 장대장의 육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2월11일에야 비로소 그의 것으로 보이는 오른쪽 다리 한 쪽이 발견됐다. 나머지 부분은 찾지 못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러시아 극동대학은 “항해를 마치지는 못했지만, 발해인들이 연해주에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을 왕래했음을 증명했다”며 교수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그에게 해양학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통영 미륵산 기슭에는 장대장 육신의 일부만이 묻힌 무덤과 ‘발해 1300호’ 추모비가 있다. 그의 영혼은 ‘동해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던 신라 문무왕처럼 지금도 동해 어디쯤에서 독도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경향신문 20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