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이 사는 이야기] 서길수 고구려연구회장

“광개토대왕비는 5세기 고구려 거석 문화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로제타 스톤’입니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장(63·서경대 교수)은 고구려에 푹 빠져 있다. 한·중 수교 6년전인 1986년 중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지금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중국 대륙을 누비며 관목과 잡풀더미에 묻힌 130여 개의 고구려 산성을 발굴해 낸 그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움직임이 불거져 나온 지난해 6월 이후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경제학 교수인 그가 고구려를 캐 들어간 동기는 뜻밖에도 ‘배낭’과 ‘에스페란토어’였다. “대학 시절에 세계에스페란토협회 회원으로 가입해 68년부터 틈만 나면 외국으로 떠돌았으니 ‘배낭여행의 원조’라 할 수 있죠. 에스페란토 세계대회에 참석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73년 유럽,82년 중남미,83년 헝가리,86년 중국,87년 폴란드,88년 쿠바 등을 찾았고 89년말에서 90년초에는 동유럽과 시베리아를 집중적으로 여행했지요. 그런 경험들이 동서양을 교차하는 대륙적인 시각을 갖게 한 것 같아요.”

동유럽과 시베리아여행의 결과를 ‘동유럽 민박 여행’(1,2권)과 ‘시베리아 횡단열차’라는 책으로 펴내기도 한 그는 단국대에서 ‘한국이자사(利子史)’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세계에스페란토협회 임원을 거쳐 현재 문화재청 북한문화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70여개국을 발로 돌아본 베테랑 배낭족의 눈에 고구려라는 ‘잃어버린 왕국’이 들어온 것은 지난 89년.

“당시 만주에 있는 안시성을 찾아갔을 때 현지 조선족들이 안시성은 물론 당 태종의 30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의 장수 양만춘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는 사실이 안타까워 고구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게 됐습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고구려 찾기에 나선 것은 1990년,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서 환도산성을 만나면서 부터다. “환도산성의 산등성이에서 성벽을 보는 순간 고구려산성이 1500년이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하는 충격에 휩싸였지요. 그 때가 마흔여덟이었는데 내 인생의 50대를 고구려에 바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91년 여름방학을 이용,인천에서 배를 타고 산둥(山東)반도를 거쳐 다롄(大連)에 상륙한 그는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환인의 홀본성(오녀산성)을 한국인 최초로 답사했다. “당시 홀본성은 외국인에게 개방이 안된 곳이었지만 그래도 산성에 올라갔어요. 내친 김에 백두산을 세 차례나 올랐는데 그게 수상했는지 백두산 정상에서 국경수비대에게 붙들려 초소에 감금되는 등 곤혹을 치르기도 했지요.”

93년에는 아예 한학기 동안 옌볜(延邊)대 조선문제연구소 객원교수로 건너가 50여개의 고구려산성을 답사했다. “답사를 마치고 옌볜대 기숙사에 돌아와 심한 이질을 앓았습니다. 왜 ‘정로환’이라는 이질약이 있지 않습니까? 청나라에 쳐들어온 러시아군대가 이질에 걸려 패주한데서 유래한 약 이름이지요. 물과 음식을 갈아먹은 탓인데,나흘을 시름시름 앓다가 통역을 해주던 조선족 청년이 구해온 생아편을 떼어먹고 겨우 회복할 수 있었어요.”

지도 한 장에 의지한 그의 답사여행은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찍어놓은 중국내 고구려 유적 관련 자료만해도 슬라이드 1만여장,동영상 100 시간 분량에 이를 정도다. 94년 그가 경복궁내 민속박물관에서 5개월동안 전시한 ‘고구려특별대전’은 관람객들에게 1500년 세월을 거슬러 역사의 저편에 실재하는 고구려의 모습을 각인시켜주었다. “배낭여행의 경험이 답사때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산성에서 산성으로 이동할 때 교통편이 없어 달구지나 나룻배를 이용한 것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외국인에게는 1등석 표만 팔기 때문에 싼 기차표를 사기 위해 해바라기씨를 씹어가며 중국사람처럼 행세하기도 했죠. 제가 학창시절에 암벽타기를 했는데 그때 다져진 체력이 아니었다면 나홀로 답사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혼자서 그것도 하루에 몇차례씩 산을 오르내린다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죠.”

그는 84년부터 94년까지 10년간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이란 단체를 만들어 일제가 우리 산 곳곳에 박아놓은 쇠말뚝을 찾아다니며 ‘쇠말뚝 뽑기 작업’을 했고 그 결과를 ‘풍수침략사 시론’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가 찍은 고구려 유적 사진과 비디오는 방송사에서 별도의 편집 작업 없이 쓸 정도의 수준급으로 정평이 나있다. “산성을 오르면 언제나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대학 때 D&P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익혀둔 사진 기술을 요긴하게 써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배낭여행,사진,암벽등반 그리고 에스페란토어…. 실로 그의 고구려 연구는 학창 시절의 취미가 총체적으로 모아져 이루어진 개가였다. “80년대만해도 고구려 관련 책을 뒤적이면 빨갱이로 보는 시각이 없지 않았죠. 그러나 일본을 경유해 입수한 북한 및 중국 자료는 2차적 사료여서 답답하기 짝이 없었죠. 그러니 현장 답사를 할 수밖에요. 96년부터는 중국 학계에서도 저를 알아주더군요.”

하지만 그는 정작 국내 역사학계의 보수적인 장벽에 부딪혀 비주류로 취급받는 설움을 겪어야 했다. 왕조사 중심으로 단단하게 짜여진 기존 역사학계에서 민속,음식,음악,벽화,의복 등 세부적이면서도 다각적인 시각으로 고구려사를 연구해온 그는 언제나 이단아로 취급당해왔다. 학술진흥재단에 연구비 신청을 했으나 번번히 탈락하는 설움 끝에 그는 늘 홀로서기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답사 비용을 마련해야 했죠. IMF 전만해도 기업체에서 강연 요청이 끊이지 않아 강연료 수입으로 지탱했지요.”

그러나 IMF 이후에는 그나마 강연이 줄어드는 바람에 50평쯤되는 고구려연구회 사무실을 줄여 현재의 위치인 서울 동교동의 지하 빌라로 옮겨왔다. “어차피 외로운 길이 아니겠어요? 따는 제가 너무 앞서 나간 탓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제는 다 초월했습니다. 제가 좋아서 한 일인데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요즘 중국의 동북공정이 터져나오자 제가 10년 정도 앞서 진행한 고구려 연구 성과의 가치를 차츰 알아주더군요.”

그는 “중국이 고구려사뿐만 아니라 앞으로 간도 문제,국경선 문제 등을 얼마든지 들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며 “스키타이학회,몽골학회,시베리아학회 등 모든 학회가 총체적으로 참여해 중국사를 우리의 시각으로 쓸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이징(北京)의 자금성이나 만리장성을 보면서 열등감을 느끼는 한국 관광객들이 있는데 따지고 보면 만리장성의 많은 부분은 명나라때 쌓은 것입니다. 고구려 산성보다 1000년이나 늦은 것이죠. 고구려 산성은 그만큼 위대한 한민족의 유산입니다.” 그는 시간의 경계를 넘어 역사를 여행하는 영원한 배낭족이었다.

(국민일보 20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