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무효=간도협약 무효"

간도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원했던 민족시인 윤동주의 고향이기도 하고, 기갈이 하늘을 찌르는 기마민족 고구려의 찬란한 기상이 흘러 넘쳤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 땅은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성지처럼 사랑했던 우리의 옛땅이다. 옛날, 아주 먼 옛날부터 한 줄기 해란강이 굽이굽이 흘렀던 땅, 그 해란강가에서 마른 바람을 맞으며 나라없는 설움을 독립운동의 에너지로 전환해야 했던 우리 아버지들의 말발굽 소리가 통절하게 울렸던 땅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일제 36년을 거친 사이 간도는 우리에겐 까마득한 옛날 얘기로 잊혀져 갔다. 지금은 중국의 소속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간도는 실은 우리땅이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땅이다.

아시아 동북쪽 찬란했던 대제국 고구려가 무너지고, 우리가 잃어버린 발해의 역사와 함께 우리는 넓은 초원을 달리며 아시아 질서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우리의 옛날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한 번도 두만강 이북 간도땅까지 내준 적은 없다. 두만강과 토문강이 흐르고 북으론 해란강이 흐르는 그 기름진 땅은 조선 후기 청과의 국경지대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대한 신비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이 땅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민초들의 마지막 꿈으로 남을 수 있는 땅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두만강 이편에서 쫓겨간 설움 많은 민초들의 치욕을 감싸안으며 민족의 혼을 불사른 그 땅은 확실히 애달픈 우리의 민초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민족의 성지였다.

간도에서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많은 숫자와는 관계없이 집요한 일제 때문에 간도는 중국땅이 되어버렸다. 이른바 간도협약(1909년)이 그것이다. 그리고 일제의 통치기간을 거치면서 우리는 머릿속에서 우리의 성지를 지워갔다.

간도협약으로 일본은 우리땅인 간도를 제 마음대로 중국(청나라)에 넘겼다. 만주철도부설권-탄광채굴권과 맞바꾼 것이다. 그런데 그 간도협약이 원천적 무효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100년의 침묵을 거둬들이고 간도되찾기운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

간도는 찾아야 하고, 찾을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가 우리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을 수 있었던 건 을사5조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도협약을 가능하게 했던 을사5조약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 국제적인 시각이다. 그렇다면 을사5조약에 의해 체결될 수 있었던 간도협약도 당연히 무효가 된다.

1963년 UN 국제법위원회가 제출한 '조약법에 관한 빈협약'에 따르면, 강제나 협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고 되어 있다. 더군다나 그 협약은 위협과 강박으로 체결된 조약의 전형적 사례로 1905년 을사5조약을 들고 있다. 사실 을사5조약은 그 당시 황제였던 고종의 비준도 없이 외무대신 박제순과 내각총리 대신 이완용의 이름만으로 체결된 것이므로 당연히 무효인 것이다.

을사5조약이 국제법상 효력이 없다는 사실이 국제적으로도 벌써 확인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간도를 되찾아 올 것인지 지속적이고도 꼼꼼하게 연구해야 한다. (김원웅/국회의원-열린우리당)

(뉴스메이커 2004-2-7)